[파친코] 붓을 들고🖌️ 세상 앞에🌳 – 김상화 파친님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가 지나는 이 무렵, 노을 지는 하늘을 자주 봅니다.🌅 저 구름과 빛깔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저 바라보다 보면 어느덧 어두워 뒤늦은 여운이 아쉽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순간을 붙잡습니다. 그림으로🎨, 이야기로📝, 영상으로🎥. 표면의 전달은 그 여운을 증폭하여 심연에서 공명하기도 합니다. 낮이 긴 6월의 파친님은 문화예술인, 김상화 님입니다!
#1. 파친님, 스스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두꺼비’, 김상화(相和)입니다. 지금은 이런저런 직함을 내려놓고 있는 상태라서, 제 이름과 별명으로 소개를 드려요. 부산의 문화예술 영역에서 오래 있었는데, 요즘에 활동명을 따로 쓰듯이 80년대 ‘그림패 낙동강’에서는 별명을 불렀거든요. 이때 만든 ‘두꺼비’ 별명과 낙관을 지금도 쓰고 있어요. ‘서로 화평하라(相和)’는 이름 뜻과 달리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만😅, 이름에 걸맞게 마음 모아 일하는 여러 단체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일을 맡아 힘차게 밀고 나가면서 옳지 못한 상황을 만나면 바로잡으려 애써왔는데요. 실은 제가 매우 내성적이라서 앞에 나서 일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늘 고역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정의로운 선배로서 기억되고픈 작은 바람이 있지요🙏. 여전히 저는 문화예술인 김상화🐸입니다.
#2. 파랑과 어떻게 연을 맺게 되셨어요?
미얀마 민주항쟁 연대집회📢를 부산역 광장에서 매주 하던 때에, 파랑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제가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미얀마 민주항쟁 관련 영화를 상영하고 활동가를 초청하며 성명서도 쓸 때였는데요. 새로운 인권운동의 틀이 만들어진다는 데에 마음이 훅💙 끌렸어요. 그래서 덮어 놓고 함께하게 되었답니다.
#3. 파친님의 부산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이력이 궁금합니다!
제가 부산에서 주욱 나고 자랐지만, 사람들과 쉽게 사귀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어릴 때부터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 제게 그림🖌️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수단과 같았어요. 고2 때, 화실을 가진 선배를 어쩌다 알게 되어 학교도 잘 나가지 않으면서 혼자 화실에 박혀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그때 저는 불화(佛畵) 중 심우도(尋牛圖)🐂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러다 운 좋게 대학에 가고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회원이 되면서 미술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부산지역 미술가를 중심으로 1986년 ‘그림패 낙동강’을 만들고, 3년 뒤 그림패가 ‘부산미술운동연구소’로 개편될 때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쓸 사무실을 직접 마련했어요. 80년대는 사회변혁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고, 개인의 삶⭐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어요. 자연스러운 시대 흐름에 저 또한 손에 붓을 들고 스며들었고, 작은 역할이나마 해야 한다는 마음이 늘 앞섰어요. 이때 배운 ‘첫 마음🕯️’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요.
1990년대 들어, 한 장면으로 표현되는 회화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영상🎞️에 관심이 커지면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다가 ‘애니메이션창작실 디지아트’(1994)를 창립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1996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발에 ‘꿈꾸는 날’이 초청되면서🎉 애니메이션 창작자 및 교육자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부산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인들과 조금씩 교류하면서, 결국 부산독립영화협회 창립(1999)에도 함께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부산예술대 만화애니메이션과에서 1996년부터 2013년까지 학생들과 뒹굴었네요😄.
2000년에 부산독립영화협회 대표를 맡으면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지금 부산국제단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일도 맡게 되었답니다. 동시에 2005년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만들어 올해 1월까지 집행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인디애니페스트,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영화 관련한 여러 곳에서 일해 왔네요. 2000년대 들어 제게 큰 기쁨🌷은 영화제를 통해 아이들을 만난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고, 2000년부터 지금까지 양정청소년수련관, 2010년부터 어린이문화연대에서도 작은 역할들을 하고 있답니다.
#4. 화실 속 수줍은 아이가 부산을 대표하는 영화제를 꾸리기까지의 여정이 꼭 영화 같아요. 앞에 나서야 하는 고역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쉼 없이, 때론 겁 없이 새로운 단체들을 만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쓰임이 되는 예술🌈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사회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제가 가진 힘이라면 힘🌳이겠지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내세워 이른바 ‘공공예술’이라고 하는데, 제가 부산에서 활동하는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과 함께 그런 일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산교통공사 문화예술자문단’을 꾸려서 도시철도 곳곳에서 전시와 연주, 춤 공연을 두루 펼치는 공간 개발 사업을 했답니다. 그러다 수영역 지하상가에 2009년 ‘문화매개공간 쌈’을 열었고, 다른🚊 곳곳에도 북카페와 독립예술인을 위한 문화공간이 생기게 됐어요. 그때 ‘쌈’에서 매주 예술가 한 분을 모시고 시민과 얘기 나누는 ‘쌈수다’를 2010년부터 진행했고, 해마다 <작은 공간 큰 이야기-문화매개공간 쌈에서 만난 예술가>라는 책📔도 7권까지 엮어냈어요. (8권은 편집이 마무리 되었지만 책이 되지 못하고 대기 중이랍니다.) 그것과 함께 ‘사회적기업 문화예술사업단 BiKi’를 설립하여 예술가 40명이 각자의 활동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사업을 펼쳤고, 전통시장🍜에서 문화예술을 입히는 프로젝트, 보수동책방골목문화관☕, 영화공간 보기드문🍿 같은 공간도 만들었답니다~
#5. 부산 곳곳에 파친님의 손길이 담겨 있네요! 지금 마음 쏟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제게 남은 소명처럼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지난 5월에 어린이날제정102주년기념사업단 위원으로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행진과 기념식, 체험 행사를 열었고, 부산에서도 방정환 선생의 동시를 제가 손글씨로 써서 ‘쌈’에서 전시했어요. 지난해 어린이해방선언100주년🎊을 맞아 어린이해방선언문 손글씨 전시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에요. 순창 ‘스페이스쑨’에서 전시를 마치고, 서울 옛 ‘학전’에서 하게 될 예정이랍니다.📜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영화읽기’ 강의도 하고, 아이들이 직접 영화로 생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도 하고 있어요. 그들이 만든 영화를 공유할 새로운 형식도 고민 중이고요.
한편,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열린 ‘생명가덕전’🌱 전시에도 참여했고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고려인, 중국동포(조선족), 일본동포(자이니치) 3~4세 중 한국 춤을 익히고 공연 활동을 하는 예술인과 함께 ‘통일과 평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준비 중이랍니다.
영화를 매개로 생각을 나누는 일이 참 좋아요. 영화의 주제가 무궁무진한 만큼, 제 오지랖(!)도 넓거든요. 세상 여러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과 사랑을 실현하려고 나름 애쓰고 있어요.😌
#6. 마지막으로 파랑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인권운동이라는 게,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뭇 생명이 존엄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거, 맞지요? 저는 그 방식이 다양하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세상에 제안하고 펼쳐내도록 애쓰겠습니다. 파랑은 언제나 제가 기댈 언덕🌊일 테니까요!
파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자승이 소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심우도(尋牛圖)’ 10폭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오롯이 소를 찾아 헤매던 동자승은 결국 피리를 불면서 소를 타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 없이 홀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아 마주한 사람만이 세상을 품듯이. 피리 대신 붓을 들고 있는 파친님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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