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어느 날, 봄이 온다🌷 – 박문진 파친님
봄으로 접어든다는 입춘이 있던 그 주에 겨울처럼 눈이 내렸습니다. 바람마저 매서웠던 2월의 한 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건 눈송이❄️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옵티칼 구미공장 옥상. 400일이 넘도록 버티고 있는 이들의 눈길 배웅👋을 받으며, 반드시 땅에서 그들을 만나고자 길 떠난 사람들. 2월의 파친님은 그 길을 앞장선 박문진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님입니다!
#1. “파친님, 스스로 소개 부탁드려요~”
봄이 오면 머리에 꽃 달고 살랑대는 아지랑이처럼 흙냄새 맡으며 자연 속에서 뒹굴고 싶은 박문진🌸입니다. 누려야 할 것들을 못 누리고 주눅 들어 사는 병원노동자들의 억압된 현실을 사람 사는 현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노동조합 활동가이고요.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싶어 간호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노조 위원장 제안이 들어왔어요. 조언을 구한 목사님의 ‘지금 여기가 아프리카!’라는 말씀을 듣고 위원장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제 팔자가 꼬여, 환갑이 넘어서도 이러고 있네요.😅
#2. “파랑은 어떻게 알고 연을 맺게 되셨어요?”
2007년 두 번째 해고 뒤 복직투쟁을 하던 중, 2016년에 1년 동안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갔어요. 몸은 마르고 마음은 막혀있던 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저를 단단하고도 흐르도록🌳 했어요. 그 계기가 ‘안양숙꿈나무장학기금’이었어요. 2014년에 세상을 떠난 노동운동가이자 인권활동가였던 고 안양숙님을 기억하며 조성된 기금인데, 지금 파랑의 정귀순 이사장님이 제안해서 만들어졌어요. 부산 일신기독병원 노조위원장으로, 도시빈민촌의 아이들, 이웃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살고자 했던 안양숙님은 저와 닮은 점이 많았어요. ‘안양숙꿈나무장학기금’ 만남의 날 모임을 파랑에서 하면서 파랑을 알게 됐고 친구💙가 되었어요~
#3. “간호사님이 ‘어느 날 노조위원장 제안’을 받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버지가 고1 때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져 직장 생활을 2년쯤 하고 인천간호전문대학에 들어갔어요. 임상 경험을 쌓으려고 병원을 알아보는데 친구가 대구 가톨릭병원에 있어서 친구랑 같이 지내려고 대구로 왔어요. 1988년에 영남대의료원에 입사👩🏻⚕️했고 분만실에서 일했어요. ‘태움’이란 문화가 당시에는 더 심했는데, 제가 저항을 좀 했어요. 마침 노동조합 선거가 있었고, 동료들 추천으로 출마해 입사 2년 만인 스물아홉 살에 노조 위원장✊이 되었네요.
영남대의료원노조 위원장을 마치고 5년 뒤인 95년에 병원노련(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지금은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되었고, 파업하다 해고되어 대구교도소에서 8개월 수감 생활을 하던 중, 당시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부위원장에 제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감옥 안에서 들었어요. 병원노련 당시 산별노조 전환이 최대 목표🧭였고 96년 2월에 석방되어 그 일에 집중했어요. 그러다 96~97년 ‘노개투’(노동법 개정 투쟁) 총파업이 시작되면서 민주노총 임원과 제게 수배령이 떨어져 명동성당에서 텐트 치고 농성했어요. 그렇게 우리 노동운동사에 보건의료노조라는 산별노조🚩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답니다. 지난한 투쟁을 거쳐 2000년에 복직했고 조직도 복원되었어요.
저는 노조 활동이 재미있었어요.😃 저희 임금과 근로조건도 중요하지만, 과잉진료나 환자 인권과 관련한 문제 제기를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병원노련은 특히 환자‧보호자들의 권익과 처우개선을 위해 많은 일을 했어요. 의료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환자들의 권리선언, 금연을 시작으로 의사들의 연구를 위해 환자의 동의 없이 하는 각종 검사💉를 금지했고 병실에서 동전 넣고 봐야 했던 TV 시청 무료화📺, 냉장고‧샤워실‧보호자 침대‧다인실 침대마다 커튼 설치🛏️, 수술 과정 모니터 설치, 매점 가격 인하, MRI‧CT 보험 적용, 나아가 의료민영화 반대… 우리의 문제 제기로 병원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는 걸 보니 재미가 있더라구요. 조합원들도 투쟁을 통해 딛고 있는 현실이 개선되고 또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어요. 특히 파업하고 난 뒤 정치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얼마나 놀랍고 기쁘던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파업🔥의 뜨거운 함성, 깃발, 자신감, 발걸음들은 지금도 생생해요.
#4. “간호사이면서 노조 위원장으로서 존재의 목적을 넓혀오셨네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 옥상으로 오르셨지요?”
2006년 병원에서 영대노조를 깨고 13명을 해고했어요. 2010년 대법원에서 저를 포함해 3명을 제외하고 모두 복직되었지만, 아직도 조직은 복구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2년 뒤인 2012년 국정감사에서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심종두 노무사의 창조컨설팅이 영남대의료원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어요. 실제로 1000명의 조합원이 96명이 되기까지 몇 달이 채 안 걸렸거든요. 우리 노조는 조직복구와 해고자복직을 위해서 안 해본 것 없이 투쟁했습니다. 영남대의료원 학교법인인 영남학원의 실질적 주인은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였어요. 서울에 반지하 방을 얻어 후보 일정마다 쫓아다니며 피케팅을 하는 ‘그림자 투쟁’을 전개했어요. 진전이 없어서 2012년 대선 전까지 57일 동안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했어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3000배에 돌부처도 박근혜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이후 창조컨설팅의 노무법인 인가는 취소되고 심종두 대표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창조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 노조가 파괴된 우리는 공소시효가 끝나 법적 대응을 할 수 없었어요. 촛불 정부가 들어섰고 영대노조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도 재가동됐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었어요. 땅에서 다 해봤으니 올라갈 수밖에요. 2019년 겨울☃️ 스턴트맨의 등을 타고 아찔하게 도착, 75m 고공 생활을 시작했어요. 같이 해고된 송영숙 동지와 함께 올라왔는데 송 동지는 몸이 안 좋아져서 먼저 내려갔고, 병원과 합의할 때까지 227일 동안 살았네요. 노조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거는 사회가 아니길 바라며 땅으로 내려왔는데, 여전히 오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보며 마음이 무겁습니다.
#5. “그래서 뚜벅뚜벅 걷고 계시지요. 걷게 된, 걷는 마음을 들려주시겠어요?”
고공농성 전에 유서를 써두었더랬어요. 오르기로 작정한 마음이 무엇인지 저는 알아요. 죽을 각오로 올라오고 나서는 막상 매 순간이 생존 싸움이에요. 49.9라는 숫자의 온도계를 녹여버린 여름, 아침마다 천막 끝 고드름을 걷어야 했던 겨울, 난간 너머로 밀어낼 것 같은 돌풍, 그리고 하늘 아래 홀로 있음.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한 힘은 사람들의 응원⭐이었어요.
많은 투쟁사업장이 있지만 한국옵티칼 박정혜, 소현숙 동지들이 구미공장에 오른 지 1년, 얼마 전에 400일이 넘었어요. 작년 11월에 열흘 동안 부산에서 구미까지 김진숙이랑 걸었는데 변화가 없어 2월부터 구미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다시 걷고 있어요. 얼마 전 세종호텔 고진수 동지의 고공농성 소식을 들었어요. 여전히 노동자들을 하늘로 몰아내는 사회에 정말 화가 나요. 동지들이 이겨서 땅을 디딜 수 있게, 제가 받은 땅의 응원🌿을 동지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사실 부산-구미 경상도 길은 좀 외로웠어요. 근데 이번에는 지역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든든하고, 반짝이는 젊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설레기도 해요. 반나절 걷고 난 저녁에는 뻗어버리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또 누굴 만날까?😄’ 생각에 신나요. 하늘 아래 동지들과 땅 위 친구들을 잇는 뚜벅이길은 3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6. “앞으로 파친님의 또 다른 ‘어느 날’ 계획과 더불어 파랑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저에겐 오래도록 미룬 꿈이 있어요. 평생 노동운동가로 살면서 곱게 간직해온 아프리카로 가는 꿈을 이제는 이루고 싶어요. 작년에 필리핀으로 넉 달 정도 다녀왔는데, 아프리카에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량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여행🦥도 다니고 싶고, 멋있는 옷🥋을 입고 강호무림의 세계를 평정하고도 싶고, 좋아하는 산🌄에도 오래 머물고 싶고, 요리🥙도 배우고 싶어요. 모두 틈틈이 할 거예요.
멀리 내다보는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해내는 정귀순 선배의 열정을 존경해요. 인권과 노동 영역의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일들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챙기는 파랑, 영원하라!
“‘옥상’이라고 하면 뭔가 억울해요. 사투를 벌이던 그곳이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뚜벅이길을 함께 걸으며 파친님이 원고에 대해 조심스레 건넨 의견입니다. 읽는 분들을 위해 질문에는 그대로 ‘옥상’이라 두었습니다.
2020년 겨울, 반드시 땅에서 만나자던 약속을 우리는 지켰습니다. 그리고 먼저 내려온 땅에서 이제는 동지들을 맞이하기 위해 걷습니다. 눈바람 몰아치던 첫날로부터 차츰차츰 햇살☀️이 스며들어, 꼭 뚜벅이들이 봄을 부르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고픈 ‘아프리카의 꿈’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온 파친님과 다시 약속합니다. 동지들을 반드시 땅에서 맞이하자고. 그날이 우리의 봄날🌼, 머리에 꽃 달고 같이 놀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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