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파친코 3화 / 최영아

언론·기고

[파친코] 파친코3화 / 최영아

 

반갑습니다, 최영아 파친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를 소개드리자면, 저는 장애활동가고요. 장애현장에서 당사자들하고 함께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그렇게 현장에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그동안 당사자분들하고 나눴던 이야기를 의회로 가져가서 이어 말할 수 있었던, 그런 굉장히 값진 경험을 얼마 전까지 했고요. 그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하면서 실질적으로 장애인의 삶에 다가가는 정책을 만드려고 노력했던,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지금은 다시 당사자 현장으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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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당사자’인 거죠. 장애당사자이면서, 당사자로서 같이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곳곳에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 전달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에요. 사회가 이분들의 목소리를 잘 안 들어주니까요.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리게 하는 일에 조금, 조금 노력한 사람.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셨다고 하셔놓고 조금 노력한 사람이라고 끝내시니까요.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요?

제 딴에는 억수로 노력했는데,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드러나는 게 다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든 의미보다도 자기 삶에 지금 당장 유효한가를 놓고 봤을 때 아쉬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저는 그런 마음도 이해해요.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도, 바라는 상도 다 다른 게 당연한 거니까요.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또 어쩌면 그들을 대표한다는 건, 그런 일이군요.

그런 거죠. 저만 해도 당사자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고, 많은 시선의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제가 서른 중반쯤에 장애운동현장에 들어왔어요. 그 전까지의 저는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처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어요. 비장애인들 앞에서 내 장애를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포장하려 애쓰면서 살았었죠. 장애를 수용하지 않은 채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랬더라고요. 장애 아닌 척하고,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내 장애가 두드러지지 않게 아등바등하며 살았죠. 지금은 제가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보조기 신고 목발 짚으면서 다녔어요. 

(놀람)

서른 몇 살까지였던가, 하여튼 그렇게 내내 살다가 우연찮게 장애전담어린이집에서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취학 전 장애아동들을 돌보는, 말 그대로 장애 전담 어린이집인데요. 거기서 운전기사를 했었어요. 그 시절 제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스타렉스를 몰고 등하원을 시켜주는 일이었죠.

(놀람2) 아! 그래서! 역시! 운전 자신감! 전국 여행과 세계일주!!! (*인터뷰 전 영아파친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파친님에게도 넉넉히 쉴 기회가 있다면 뭐하고 싶으신지 질문했었는데요. 큰 차를 개조해 배리어프리한 캠핑카를 만들어 배우자와 함께 전국여행과 세계일주를 다니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신나는 꿈! 꼭 이루길 응원합니다!)

그거지! (웃음) 그전에는 많이 놀러다녔는데. 차몰고 친구들이랑 이곳저곳 다니고, 아, 책나눔터라고 책방도 잠깐 했었네요. 그 왜, 예전에는 만화책이랑 소설책이랑 빌려주는 곳 있잖아요. 뭔가를 잠깐잠깐씩 배우러 다니거나 하기도 하고. 주로는 친구들이랑 놀았어요. 재밌었다. (웃음) 차몰고 다니면서 내 잘난 줄 알고 온데 돌아다니고,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멋쟁이!

아니, 자기 잘난 양 개인차를 막 운전하고 다니고, 그렇게 살았던…

그거 되게 멋있는데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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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웃음) 어쨌든 거기서 장애아를 만났고, 등하원 시키면서 장애아를 둔 부모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죠. 그때 이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이 부모님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저한테 좀 다가왔죠.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고 덩치가 점점 크면 부모님이 케어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서 온 가족이 들러붙어서 하던 것도 생각나고요. 한 아이 어머님은 저에게 속상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온가족이 쇼핑을 하러 가서 아빠가 우연히 친구를 마주쳤는데 아빠가 자기 외투를 벗더니 자기 애를 덮었다는 거예요.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그게 그 집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실인 거죠. 장애에 대한 인식이 그런 단계라는 거고요. 그곳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면서 부모님들, 양육자들을 위한 곳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아직 챙겨보지 못했는데 이제 제가 현장에 왔으니 챙겨보려고 해요. 그렇게 어린이집에서 당사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동료지원, 동료상담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렇게 장애운동진영에 발을 담그게 된 거죠. 거기서 장애가 한 개인이나 그 가족의 탓이 아니라는 것,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싹트던 시절이었죠. 

20년 전의 일이네요. 그러면 그때부터 함세상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활동하시면서 일하시고, 배우자도 만나시고, 체험홈도 만드시고, 계속 활동하시다, 시의원이 되어 정치 활동도 하시고… 한마디로 활동가의 삶이 시작되신 거군요…!

그렇죠, 그렇죠.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함세상에 올 즈음에 자립생활이용교육을 받으면서 조금 더 눈을 뜨기도 했고요. 그전에 저는 장애가 내탓인 줄 알고 감췄다고 했잖아요. 여기에 와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생각하면서, 장애가 내 탓, 개인의 탓이 아니고 사회적인 탓이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이 있는 문제라는 걸 좀 더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그전까지 내탓인 줄 알았거든요. 내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어. 그때부터는 장애를 감추지 않고,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휠체어를 이용하기 시작했죠. 일하는데 보조기 신고 목발짚고 다니니까 불편하더라고요. 힘들고요. 내가 굳이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들여가면서 이렇게 해야 할까 싶고, 그래서 휠체어를 탔죠.

영아 파친님의 파란만장한 자기소개에 이어, 파친님은 어쩌다 파랑과 만나 파친이 되셨는지도 들려주세요. 파랑도 영아 파친님의 히스토리에 한 줄 꼽사리 끼고 싶습니다!

왜 ‘어쩌다’에요. 음, 그냥 뭐, 어쩌다보니? (웃음) 

이래서 ‘어쩌다’입니다. (웃음)

정귀순 이사장님을 알고는 있었어요. 정귀순 대표님께서 운영하시던 민들레기금에서 활동가해외연수프로그램을 했는데 저희 센터에 몇 분들이 다녀오시기도 했고, 예전에 ‘장애인참배움터’가 ‘이주민과함께’랑 같이 프로그램 하면서 이주민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그루쌤도 만나고 하면서 정귀순이라는 이름을 들었었죠. 그리고 의회 들어와서 인권도시 부산 의회연구모임을 하면서 정귀순 대표님, 송시섭 교수님하고 다 만나게 되었죠. 그래서 같이 인권도시 연구도 하고, 인권행정체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때 부산인권조례 개정하면서 처음으로 외부 인권위원장으로서 정귀순 위원장님이 임기 시작하시고, 부산인권정책포럼, 부산인권아카데미도 함께 만들었어요. 부산시인권정책기본계획 연구용역을 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연구단이 없어 타지 연구팀에 맡기면서 지역 실정과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오고 부침을 겪으면서 지역에도 인권행정, 인권연구 그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죠. 그때부터 저는 이미 파친이었달까요.

파랑이 생기기 전부터 파친이었다니. 이런 고백하시기 있나요. 이런 감동주기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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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님, 6월에 시의원 임기를 마치자마자 함세상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로 돌아와 현장활동을 이어가고 계시잖아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이야기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라가 가난한 시절의 장애인정책은 거주시설 중심이었어요. 장애인은 시설로 보내버리는 분리정책이었죠. 이제는 장애를 분리하고 보호하는 관점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사는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우선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용자로 전혀 간주하지 않고 계단을 만들고, 건물을 만들고, 버스를 만들고, 지하철을 만들었잖아요. 사회를 구성할 때 장애가 있는 사람은 없는 존재로 취급된 채로 정책이 만들어졌고, 도시도 그렇게 구축되어버렸는데, 이제는 이 사회 속에 너무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도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봐요.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죠. 그리고 누구나 고민해야 하고요. 장애, 배리어는 장애인만의 고민,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장애 지원으로 그치는 시혜적 관점이 아닌 기본권을 보장하는 관점으로 사회적 계획, 도시계획을 만드는 고민을 반드시 해야 해요.그래서 앞으로 저는 이제 그런 활동들을 할 거예요. 이동의 권리, 보행의 권리,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활동할 거고, 그러한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메시지는 ‘장애인 이웃이 여기 살고 있다.’, ‘함께 살자.’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장애가 있는 여러 유형 중에 가장 약자는 거주시설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에게는 사회가 제대로 해준 게 없고, 이분들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주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어떻게 살 건지, 어떤 집 형태에서 살고, 어느 동네에서 살 건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하죠.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지역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고요. 또 계속 준비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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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체험기] ‘버스타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장애인버스타기운동’에 참가하고) ⓒ배성민

사실 탈시설 논의를 앞두고 중증장애 자녀를 둔 보호자들은 지역사회가 무슨 준비가 되었냐고도 하시죠. 아무것도 준비 안 되었는데 무조건 탈시설만 이야기하는 게 맞냐고 불안해 하시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지역사회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보호자들이 거주시설의 형태만 선택지로 두기보다는 점차적으로 탈시설의 선택지가, 그 안에서도 아주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기를 바라요. 그걸 위해서 저도 노력하고 있고요. 그밖에도 장애인의 일할 권리, 장애인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지원주택 모델의 확대, 지원인력 확충이 필요하고요. 이 모든 게 장애인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거든요. 비장애인이 누리고 있는 의료접근성, 행정접근성, 보행권을 장애여부와 상관없이 누릴 수 있는 삶, 한마디로 그걸 장애해방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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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권에 대해 발언하는 최영아 부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이윤경 2016.06.17

그리고 발달장애인 분들이 자립을 해서 혼자 살 때에 활동지원시간이 120시간 남짓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굉장히 적은 시간이에요. 서비스도 부족하고 혼자 살아 외롭기도 하니,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고, 그래서 자주 통화를 하려고 하기도 하거든요. 이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 사람과 정말 인연을 맺고 관계를 맺고 싶은 분들이 있을까 하고요. 서비스 이용과 제공의 계약적, 노동적 관계의 조건 없이도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요. 그래서 이런 이웃의 마음을 가진 분들을 좀 네트워킹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지금 어쨌든 센터에서 사후지원하는 과정도 있고, 그런데 그걸로 그치는게 아니라 그에 더불어 지역사회 안에서의 관계망이 쌓이면, 자립생활을 하는 장애인에게 아는 사람의 폭이 다양하고 넓어질 수 있잖아요. 저는 자립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려면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누군가의 이웃과 친구가 되기에는 아직 좀 모자란 게 많은데, 그래도 저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이웃관계망에 끼고 싶네요.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아주 웰컴입니다! (웃음)

아, 너무나 따숩습니다. 일단 영아 파친님과 이웃이라는 것부터 저도 너무 웰컴이에요! (알고보니 편집자와 파친님은 바로 옆동네 주민이었답니다!) 영아 파친님이 요즘 하시는 고민이 있다면 나누어주세요.

음, 앞서 말씀드렸던 자립생활과 관련한 고민들, 장애인들이 잘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이어서 장례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공영장례와 존엄사에 대해서도 의원 때부터 계속 행정과 민간, 당사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있어요. 시설에 평생 사시다가 60대에 탈시설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죽음이 아주 먼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평생 시설에 계시다 나오는 분들도 계시다니, 제가 감히 다 짐작할 수조차 없네요.

그렇죠. 저도 그래요. 정말 엄청난 용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발달장애인분들의 자립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중인데요. 발달장애인이라는 한 단어로 함께 불리지만 그 그룹 안에도 너무 다양한 양상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다양한 양상과 환경마다에도 안전한 지원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중증의 뇌병변장애인 분이 혼자 자립해서 사는데, 활동지원사가 돌아가고 난 밤에 갑자기 자다가 설사가 터지게 된 거죠. 혼자 처리할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가야 하잖아요. 새벽 한 시였나, 두 시였나, 그래서 그 시간에 연락을 다 돌리고, 연락이 닿는 사람을 깨워서 보냈죠. 그런 일들이 한 번씩 일어나거든요. 중증 발달장애인분들 중에는 처음에 지역사회에 나오셨을 때에는 좀 잘 적응을 못하셔서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는 분이 계시기도 해요. 집 밖을 나가서 배회하면서, 물건을 사는 것도 잘 안 되시니까, 어쩔 때는 편의점에 들어가긴 했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서 물건을 집은 채로 그 안을 계속해서 돌아다닌다던가 하시는 거죠. 이게 정황을 모르는 편의점 직원 입장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가 있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랑도 대화 나눠야 하고. 그런 일들이 계속되는 건 아니고 조금씩 줄어가거든요. 그런데 처음 자립을 할 때 아무리 활동지원사가 있고, 자립생활지원센터가 있어도, 그들이 없는 시간이 되면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지는 기분이, 처음에는 너무 힘드신 거죠. 서비스가 부족하다보니 그분들도 힘들고, 서비스노동자들도 사실 힘들고요. 저희 국장님이 막 밤새도록 지키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분명한 원칙은 어떤 분이든 지역사회에 나와서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라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도록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그런 서비스를 고민하지 않은 채로 지금 이 현실을 상수값으로 두고 장애인은 시설을 나갈 수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 자체가 차별인거죠. 

이런저런 생각이 정말 많아지네요. 

영아 파친님의 고민 나누어주셔서 감사해요. 운동의 방향과 정책 설계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하신 것 같네요. 

파랑도 그 고민을 풀어가는 길에 좋은 벗이 되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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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파친코만의 마지막 두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영아 파친님에게 인권이란? 그리고 영아 파친님은 파랑과 어떤 사이가 되고 싶으신지…!

다양하다. 다양하다.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너~무~ 다양하다~? (웃음) 존중이죠, 인권은.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것인데 안 지켜지고, 누구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조금만 다르면 차별하고 있고,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인권은 참 소중하죠. 인권플랫폼 파랑도 참 소중하고요. 파랑과 늘 함께하는 친구가 되고 싶어요. 파랑이 처음 하고자 했던 활동이 단계적으로 잘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에, 옆에서 보이지 않는 지지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 관계였으면 좋겠어요.

감동이에요. 사실 이런 언약 받으러 다니려고 파친코 인터뷰를 하는 거거든요. (웃음) 활동가를 위한 조직을 운영하는데에는 이웃 동지들의 지지가 가장 소중한 것 같아요. 늦게까지 시간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자리에서 곧 또 뵙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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