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의 친구 코너 <파.친.코.> 5화
경계를 넘어 손을 뻗는 당신, 이수연 파친님!
이번 달에는 국제가톨릭형제회의 운영위원이자 파랑의 이사님이시기도 한 이수연 파친님을 만났습니다! 수연 파친님은 오랜 시간 이주민과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해왔고, 초국적 인권옹호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파랑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걸음하셨던 수연 파친님의 발길을 잠시 붙잡아(?) 가을의 문턱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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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파친님,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가톨릭형제회’, 한국어로는 그렇게 부르고 또 불어로는 ‘AFI’(이하 아피)라고 부르는, 단체에 소속된 이수연입니다.
아피는 천주교 안에 있는 어떤 기구인 건가요?
가톨릭 신자들이 대다수인 벨기에에서 1937년에 시작됐어요. 시작은 천주교 여성들이 했지만 지금은 개신교 회원들도 있어요. 초교파적이라고까지 보기는 어려울 수 있겠고, 신구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국제가톨릭형제회는 전 세계에 곳곳으로 찾아가 그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어요.
그 사회에서 필요한 일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어떤 일을 하는가를 미리 정하고 간다기 보다 파견된 나라의 요구에 응하는 거죠. 가령 1950년대 말 한국에 오신 분들은 가톨릭 신앙 활동에 중요한 단체들을 시작하도록 돕는 것과 여성들을 위한 사도직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도 대개 여성문제로 좁혀질 수 있겠네요.

한국에 국제 아피회원들이 첫 발을 디디신지 몇 년 후면 70년이 되네요.
초기에는 총장이 있었는데, 1970년대 이후 집단리더십으로 바뀌었어요. 수평적 구조로 운영되고 있죠. 모든 회원들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저는 국제운영위원이랄까 이사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세 명 중의 한 명입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미대륙에 있는 회원 세 명이 전체 운영을 책임지고 있지요. 여기까지가 제 소개가 되겠습니다. (웃음)
수연 파친님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수연 파친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어 기쁩니다. 언제부터 아피로 활동하신 건가요?
1991년이죠. 아피는 활동이라기보다도 성소예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따라 내가 내 길에 대한 원천적인 방향을 선택한 거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라는 게 모범 답이겠네요. (웃음) 그래서 이건 단순한 직업이 아니고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을 성소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소자로서 성소를 산다’고 하지요. 이 모든 과정이 시작된 것이 1991년부터였으니까 지금 31년째네요.
그전까지는 그냥 가톨릭신자였고요. 그러다가 91년부터 아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수련을 받았고, 1995년에 서약을 했고, 서약한 뒤부터는 지금까지 아피 정회원으로 살고 있어요. 옛날에는 다른 나라로 회원을 파견해 그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자국에서 활동해요.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요.
아피들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세운 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아피가 된 거죠. 2007년 문을 닫기까지 안양전진상복지관이었던 안양근로자회관이라는 곳이에요. 거기서 일하던 중 같이 일하시던 아피회원들이 근로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냐는 요청을 주셨고 그렇게 아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 같네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죠. 제가 졸업하던 해에만 교원선발 순위고사가 중지되어 그 꿈이 좌절되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그냥 보통의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제가 지향하는 다른 방향이 분명히 있다고 느꼈어요.
20대의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그 중 한 사람은 시몬느 베이유라는 프랑스 철학자예요. 시몬느 베이유는 제 20대 초반, 대학생 때 롤모델이었어요. 또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의 초월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고요. 그가 쓴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짧은 글은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었죠. 소로우는 <월든>을 통해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시몬느 베이유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요, 삶의 방식이 다른 두 사람에게 관심을 두었던 만큼 이제 와서 보니 내 안에는 양극의 다른 자아가 있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두 사람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소로우 쪽으로는 자꾸 숲으로 가서 명상을 하라 하고, 베이유를 생각하면 현장에서 끝까지 살라 하고요.
사촌으로부터 영어학원을 하자는 요구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길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아요. 저는 안양근로자회관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월급을 얼마 주느냐,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물은 적이 없었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그 사람들이 지향하는 방향이 좋았고, 또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무조건 따라갔죠. 그리고 여기까지 왔네. (웃음) 그때 제게 같이 일하자고 편지 보내셨던 분이 지금 제가 지내는 합정동 숙소의 제 옆방에서 살고 계세요.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편지로 받으시다니.
제게 보냈죠. 와서 우리랑 같이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일을 해보지 않겠냐.
그때는 되게 정성스럽게 제안했네요.
그렇죠. 기관의 현재 상태와 단체의 어려움, 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손편지를 보내주셨죠. 그때 독일인 아피 회원과 한국인 회원 두 분이 초대를 하셨는데, 독일 회원님은 92년에 한국의 우리 기관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한 분은 서울 절두산 성지 옆의 은퇴자의 집에 계시고요.
은퇴자의 집이라는 게 있군요.
은퇴자의 집이면서 우리 한국지역 아피 본부이기도 해요. 서울 합정동에 있어요.
아피는 세계 곳곳으로 사람을 파견한다고 하셨는데요. 이것은 당사자의 자원과 의지로 가는 건지 아니면 임무처럼 배정되는 것에 가까운지도 궁금하네요.
총장과 수련 담당자들이 식별을 해서 또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파견했다고 해요. 그런데 7,8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 파견되는 것보다는 그 나라에서 자기의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비중이 점차 늘었어요. ‘내가 일하는 곳이 곧 선교의 현장이다.’라는 개념의 변화 때문에 이제 자국에서 그냥 살면서 활동해도 된다는 인식이 생겼죠. 그 후부터 전문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해졌지요. 아피들은 다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상담가, 교사,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주민 조직가, 스카우트 운동 전문가 등등… 그냥 막연히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전문분야 안에서, 그 전문성을 통해서 돕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겉으로 봤을 때는 직업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죠. 성소자로 사는 삶이 특별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각자의 직업이 있다고 하셨는데 수연 파친님의 전문성은 무엇인가요?
저는 세 개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세 분야에서 활동을 하지요. 먼저 95년부터 해온 감마(GAMMA)컨설팅이에요. 비영리 단체들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에요. 조직에 초대 받아 가서 작업을 하다 보면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때때로 있어요.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를 줄인다고 할까, 그 작업을 AMR 사이코 테라피를 통해 진행합니다. 명상을 활용한 치유 작업이에요. 마지막으로는 팀워크를 만들고 조직 구성원들이 자신을 잘 알 수 있도록 돕는 수지 에니어그램이 있어요. 저는 이 세 가지를 적재적소에 따라 배치하고 실행하는 교육 전문가라고 보면 되겠지요.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개인과 조직을 도울 때 이 세 가지 도구의 효과는 더욱 배가되죠. 그리고 자원활동으로는 네팔의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일을 2005년부터 해오고 있어요. 장학생을 선발하고 그곳의 교사들을 훈련해요.
저도 직업인으로 살아오지 않았던 터라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수연 파친님은 조직의 상근자라고 하기도 어렵고, 그러나 프리랜서라고 하기에는 국제가톨릭형제회라는 소속이 가장 중요하고 분명해 보여서 어떻게 이런 운신의 폭을 유지하며 유연하게 활동하고 계신지 궁금했었거든요. 오늘 좀 더 잘 알게 되었네요!
살아오신 이야기도 조금 들어보았고, 파친님이 활동하고 계신 전문 영역,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영역, 긴급 대응 활동, 그리고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아피로서의 정체성까지도 좀 청해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이 활동들이 흐르고 흘러 파랑과 친구가 되셨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따지고 보면 파랑과 만남의 출발선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몬드 베이유부터라고 볼 수 있죠. 우리 사회의 가장 고통 받는 계급이 노동자, 그중에 특히 20세 미만의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제가 안양근로자회관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던 거고, 그 근로자회관에서 관심을 가져야 될 대상은 당연히 노동자이니 다양한 활동을 했었어요.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와 노동자의식과 영성교육을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주관했어요.
1969년, 도시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으로부터 온 청소년 노동자들의 복지와 상담과 교육을 위해 지어진 집이었던 안양근로자회관은 자연스럽게 90년대 초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상담과 지원을 점차적으로 확대하게 되었죠.
저는 그곳에서 91년부터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90년대 중반에는 부산에서 이주노동자 활동을 해오던 지금 파랑의 이사장님인 정귀순을 만나게 되었죠. 우리는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지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는 전국의 단체들과 협의회를 만들었죠. 그렇게 귀순과 처음 만나게 된 거죠. 아마 96년이었을 거예요. 그 만남의 장은 정기적인 모임으로 이어졌고, 그 모임이 지금까지 우리를 연결해주고 이어져 오게 하는 시발점이었죠. 달리 말하면 국내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상황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해오게 된 동기이자 과정이었죠. 우리의 만남은 캄보디아, 네팔,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지의 아시아에 있는 여러 단체들과 또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일들로 또 확장되었고요.

그러다 우리도 이제 나이도 먹고 활동의 범위도 넓어지고 햇수가 쌓이면서 2000년대부터는 활동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활동가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이 될 수 있도록 어떻게 우리가 협력하고 지원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모색을 꾸준히 해왔죠. 사실 이 파랑이라는 생명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생겼다기보다는 정귀순이라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이런 고민을 해왔고, 저는 옆에서 같이 활동을 해온 동료, 혹은 그를 잘 아는 친구로서 함께 고민해왔다고 보면 되겠죠. 물론 그 고민의 농도는 달라요. 저는 아피이기 때문에, 또 귀순과 제 교집합이 이주와 노동이었다면 그 밖의 각자의 영역들은 또 조금씩 다르니까요. 그렇다보니 저는 귀순이 지역활동가들을 두고 마음을 쓰고 생각하는 농도의 10퍼센트도 못 돼요. 그렇지만 그 끈을 놓치지 않고 함께 해왔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으니까요. 저도 함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역시! 수연 파친님도 파친이기 전에 아주 오랜, 진한 정친이셨군요.
정친? 그렇죠. (웃음) 우리가 만난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까요. 25년…도 넘었고 이제 27년이 되어가네.
저는 27년간의 동지는 물론이고 엄마 말고는 27년을 알고 지낸 사람도 없네요. (웃음) 귀순과 수연, 그 밖에도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나눠오셨던 이 오랜 고민이 드디어 파랑으로 만들어졌네요. 파랑과 수연 파친님, 우리는 어떤 사이가 되면 좋을까요?
제가 임원중에서는 유일하게 멀리 서울에 있지만,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과 그 방향에 동의를 해서 이사로 함께 하고 있고, 지지와 연대,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함께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그걸 넘어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더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가능성에 얼른 잘 닿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게 뭘지 지금도 여전히 고민이긴 하죠. 회비를 내고 회의에 오고 함께 어떤 내용에 대해서 의논을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건지. 소식을 보내오기는 하지만 샅샅히 알기 어렵죠.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고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해요. 함께 걷는 길, 파랑의 친구로서, 우리는 같은 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길의 의미는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과정 안에서 손에 잡히기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들이 그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기도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도 있죠. 이미와 아직 사이, 살짝 긴장이 있는 지금이 출발과 도착만큼이나 아주 소중해요.
이미와 아직 사이, 제가 희망과 불안을 되뇌일 때마다 떠올리는 표어이기도 해요. 수연 파친님의 말 속에서는 희망 쪽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네요. 수연 파친님이 요새 가지고 계신 고민이 있다면 파랑과 좀 나눠주셔도 좋겠습니다.
고민이라. 음. 제가 아피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현실에서 또 요구받는 일들이 있잖아요. 일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면서 현실의 필요에 적합하게 응답하면서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을지 이게 이제 고민이죠. 지금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울증 약 먹는 사람들이 정말 많잖아요. 자기자신 안에 스스로를 일으킬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이들을 만나라는 요구를 받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지. 당사자의 필요에 대한 응답을 제가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할까 하는 거죠. 또 개인의 요구와 조직의 요구가 있을 때 어디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하는 이런 고민들이 있죠.
그 균형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시는군요.
예를 들어서,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상담소를 찾아봐. 가서 상담 받아.’ 이렇게만 대응하면 간단하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만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걸 거절하고 안 만나고 이럴 수는 없거든요. 우리 한국 사회는 지금 너무 병리적인 현상들이 많은데 거기에서 무차별 개인들이 당하고 있는 심리 정서적 폭력도 심하잖아요.
그렇죠…!
그럼 그런 것 앞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나는 어떻게 어디까지 내가 응답을 해야 할까, 그걸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야 하나 이런 게 있고요. 또 아피로서는 전체 운영을 봐야 하니까 내가 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있는데 그 사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런게 늘 고민이죠.
제가 여태까지 파친코 인터뷰를 하면서 파친님들께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 중에 가장, 뭐랄까요, 대국적이고
대국적이라니까 너무 장황하게 말한 거 아닌가 몰라.
그런 고민이어서 되게 아득해지네요. 정말 정말 큰 고민이겠다.
그렇죠. 멀리 있지만 가난한 나라에 대한 관심도 또 가까이 있는 아픈사람에게도 외면만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네요. 이 초국적인 아피라는 조직을 운영하는 에너지도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데.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도 들고요.
이제 마지막 저희 질문이 남아 있는데요. 파친님에게 인권이란?
개념적으로 정리된 것은 없는데…… 통합이라고도 하죠? 포함. 포함과 배제 사이에 늘 긴장이 있게 마련인데, 저는 인권은 움직임이라고 봅니다. 누구나 누리며 향유해야 할 인권에서 배제된 사람이 있다면 포함이 되도록 해야 하겠는 그런 움직임.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가진 채 포함되어 함께 누릴 향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그 관계 안에서 생명이 피어나도록 하는 관계의 힘의 균형이라고 할까요?
천부인권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선생님의 관계와 생명이라는 말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구원하고 돕고 지지하면서 만들어지는, 그리고 그때야말로 제일 크게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권리가 인권이라는 걸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감사하네요.
누군가와 진심으로 대화하고 진정으로 지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순전한 존재로서 마주 서야 돼요. 제가 현지씨와 인격 대 인격으로 마주 앉을 때 소탈하고 솔직한 대화가 나오지, 나는 뭔데, 내가 낸데, 하는 그게 계속 강조가 되면 그 페르소나가 관계를 진실되게 만드는 것을 굉장히 가로막죠.
파친코라는 인터뷰를 핑계로 저도 이런 대화를 수연 선생님과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 선생님을 둘러싼 모든 경계를 허물고 형식적인 질문과 답을 넘어 수연 파친님을 나눠주신 시간이라 인터뷰를 읽을 파라솔 독자님들에게도 이 대화를 잘 전해드리고 싶네요. 합정으로 편안히 잘 돌아가시고, 다음 이사회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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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홈페이지에서 파친코 인터뷰 재미있게 보셨나요?
이번 호에서는 국제가톨릭형제회의 이수연 파친님을 만나봤는데요.
다음 파친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한 손에는 법전을 다른 손은 인권운동을 향해 뻗어있는 그 분, 그 분을 만납니다.
그럼 다음 파라솔에서 파친코 6화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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