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파친코 6화 / 박인순

언론·기고

 

반갑습니다. 인순 대표님! 파친코는요, 파랑에서 뉴스레터 콘텐츠를 딱 하나 만든다면 무엇을 만들어볼까 고민하다가, 파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담아보자 해서 기획하게 된 코너고요. 이제 파친님이라고 부를텐데 어색해하지마시고 (웃음) 편하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인순 파친님의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저는 54세 여성이고요. 남편과 아이랑 같이 살고 있고, 그리고 사회생활로는 직업은 전업주부이고 그리고 이러저러한 조직들에 몸을 담고 있는데, 제가 전직이 치과의사여서 ‘건강 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 경남지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이러저러한 부산에 있는 NGO들과 아주 오랫동안 연을 맺고 살아오고 있는데, 제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NGO로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곳에서는 회원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다 못하는 곳은 간혹 집회나 이런 것을 가기도 하는데요. 요즘은 머리에서 발까지가 조금 멀어졌달까요. (웃음) 머리에서 발까지가 굉장히 가까운 시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좀 멀어져 있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고, 최근에는 몸의 변화를 많이 겪고 있어서, 제 인생 전체로 보자면 다소 다운되어있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네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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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개 감사드려요. 너무 진솔하고 상세한 자기소개였어요. 

나도 주책이다, 정말.

아니요! 그게 너무 제일 좋았단 얘기예요. 그래서 감사드리고 얘기해주신 거 조금 더 여쭤보자면 이제 여러 단체와 연을 맺고 있다고 하셨는데 건치 말고도 좀 있을까요. 

그쵸. 아주 많죠. 그걸 다 이야기해요?

기억나시는 대로만요. 

일단 정의당의 당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부산을바꾸는시민의힘민들레 회원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도 최근에 회원됐고. 계속 얘기해요, 엄청 많은데?

아… 진짜 많을 거 같네요. (웃음) 

민언련도 회원이고요. 그건 다 개인적인 거죠. 또 뭐 있지? 기억이 안 나네요. 통장을 봐야 돼요.

(웃음) 통장이 제일 정확하죠. 

정확! (웃음) 아, 맞다, 이주와 인권연구소 운영위원이기도 하고요. 저를 어여삐 여기신 언니야들이 끼워줘가지고. (웃음) 이주민과 함께도 회원이고, 오래 활동했고.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많은 데에서 다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부산에서 인연을 오랫동안 맺어왔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제가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주는 거죠. 고마우면서도 솔직히 그게 좀 부담스럽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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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간이 워낙 인상깊고 또 짧지 않았고, 요 몇 년 사이 기운이 조금 가라앉아 계신 시간은 또 짧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그런 시기니까 사실 뭐라고 할까, 조금 숨어있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음… 그런데 저는 내가 건치의 무엇으로서 활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대학 때부터 ‘개인으로서의 나’도 중요하지만 ‘사회 속에서의 나’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늘 생각해왔거든요. 그 마음을 늘 아주 기쁘게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이다보니 이 기운 떨어진 상태가 스스로의 삶에서도 좋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제 기운 없음에 제가 또 기운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사실은 파친코 인터뷰도 덩달아 조금 부담스러웠죠. 지금 힘내고 있습니다. 아자!

아자!! 제가 감히 다 알 수 없겠지만 제 나름대로 그 마음이 짐작도 되고 공감도 됩니다. 저번 미팅 때 저랑 이사장님이 연타로 꼬셔서 이렇게 시작을 해버린 터라…(웃음) 그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사실 우리 인터뷰는 조금 미뤄둬야 되나 싶긴 한데.

에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네, 그럼… 아자! 어떻게, 조금 더,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자기소개 해 주신 거에서 조금 더 여쭤보고 싶은 게, 그러면 지금 가장 주요하게 활동하고 계신 곳은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이하 건치) 부경지부(부산경남지부, 이하 부경지부)인 것 같은데요. 건치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까 선생님의 언어로 건치에 대해서 소개를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경지부가 추진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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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가 풀네임인, 지역지부들을 둔 전국 조직이고요. 저는 부산경남지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어요. 치과의사들은 보통은 전문직이어서, 그 직종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성 조직들이 있어요. 부산시치과의사회가 있고, 이건 각 시마다 다 있고요. 그런데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는 직업적인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라 치과의사인 내가 치과의사로서, 이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단체예요. 그게 치과의사라는 직업인로서의 소명이나 고민일 수도 있고, 직업이 치과의사인 한 인간으로서의 고민일 수도 있고요. 각자의 주요활동이 의료라는 공공적 영역에 속해있다보니 그게 나눠떨어지는 건 아니고 다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1989년에 만들어졌는데 지역지부가 만들어진 햇수는 조금씩 다르고요. 하는 일들도 조금씩 달라요. 건치 전체의 공통사업이 있고 지부 사업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옛날에는 노인들이 틀니 맞추실 때 다 자기 돈을 내야 했어요. 근데 건치가 그 부분에 대해서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아주 오래전부터 정책 제안을 해왔던 거죠. ‘국민이 조금 더 건강하게 살게 하려면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 노인분들은 이가 없으면 외출도 안 한다. 잘 먹지 못하는 일은 생존의 문제다.’라고요. 그때는 국민연금도 없었거든요? 60살에 정년 퇴직하고 나면 65세부터는 자기 돈으로 이를 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니 그 나이 정도부터는 국가가 해주자, 이런 제도를 계속 제안한 거죠.

건치에서 입법 활동도 하셨군요.

최근에는 학생및아동치과주치의사업이라고 있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횟수는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최소 1년에 한 번은 치아 검진을 지원하는 거예요. 부산시는 초등학교 5학년이 모두 해당되거든요. 원래도 기본 검사는 교육청에서 지원이 됐었는데, 여기에 엑스레이 검사까지 포함시켰고, 좀 더 나아가서 병이 있다면 발견하고, 이가 썩지 않게 예방 치료도 하고, 일상 관리 교육하는 것까지 포함시킨 거예요. 그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치료까지 30만 원 범위 안에서 지자체 예산으로 지원하고 있어요. 국비와 시비, 구비 등이 합쳐져 있는 지원체계로 아는데, 그런 게 최근에 건치에서 한 아주 큰 일이에요. 서울이 항상 그런 사업은 먼저 하지만, 서울 외 지역 중에서는 부산이 선도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부산경남지부에서는 자발적으로 회비를 모아 그 사업을 9년째 자체적으로 운영해보고 있었거든요. 이 정책이 좋다는 건 너무 당연한 건데, 그 사업이 채택된다고 해서 또 바로 실행되는 건 아니거든요. 지자체 예산도 잡고 매칭도 하고 협의도 하고 단계가 꽤 길죠. 그래서 저희는 이렇게 필요한 일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하고 있자고 생각했고, 부경지부 예산을 가지고 모델을 만들어 본 거죠. 또 그렇게 하면 유효한 데이터를 쌓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 데이터들을 가지고 부산시에 밀어 넣은 거예요. 그렇게 시와 간담회를 하고, 때마침 동래구에 의지가 있는 구의원들이 있어서 동래구에서 조례를 만들었고, 동래구에서 제일 먼저 시작할 수 있었죠. 다음 해에는 그 사업을 부산시에서도 받았죠. 그래서 지금 부산은 전체가 다 진행되고 있거든요. 그게 전국 차원에서도 되게 빨랐어요. 물론 사회적인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치지요.

되게 뭉클하네요. 

의사들도 감동해요.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었냐고. 건치는 그런 일들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고, 단체예요. 지금 권역 장애인구강진료센터가 만들어져 있어요. 그것도 다들 가만히 있는데 시절이 좋아져서 자연스럽게 생겨버리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해달라는 데가 얼마나 많은데, 가만히 있으면 복지부에서 우선순위 주지 않거든요. 그리고 또 우리 몸 전체에서 보면, 사실 구강이라는 범위가 엄청 협소하잖아요.

그렇지만 진짜 엄청난 영향을 미치죠. 

그렇죠. 복지하시는 쪽에서도 사실은 구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요. 잘 못 먹으면 집을 안 나온다고. 아무리 좋은 복지 시설이 있어도 거기를 안 가고 사람 안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중요도에 대해 이렇게까지 인식하는 분들이 소수예요. 건치는 이런 일들을 계속 제안해 왔어요. 복지부에서 발표할 때야 건치 때문에 만든 거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가는 거죠. 부산에도 토성동 부산대병원에 부산권역장애인구강진료센터가 있어요. 그게 모든 국립대 병원에 다 생겼거든요. 이제 만 10년이 됐는데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제는 장애인 주치의 사업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병원 하나로 안 되니까요. 부산시에 장애인이 몇 명인데 병원 하나로 되겠어요? 병원에 예약이 3개월이상 밀려요. 부산에서는 장애인주치의사업이나 시립병원 관련해서 모임이 있어요. 관련 일을 하는 치과와 NGO가 함께 해요. 거기서 이야기가 돼요.

건치가 그런 일들을 계속 건의해왔는데, 지금은 건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예전보다는 약간 덜하긴 해요. 어쨌든 워낙 할 만한 걸 많이 했고, 복지부에서도 많이 받았고요. 그래서 정말 시스템이 하나도 없던 시절보다는 시스템 전체를 구축하는 단계까지는 덜 가는 게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각지대와 공백은 늘 있기 때문에 계속 필요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죠. 예를 들면 지금은 장애인 무료틀니 대상자를 확대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까 보건소에서 하는 무료틀니사업이 65세이상 노인이라고 했잖아요? 65세부터는 틀니가 의료보험에 들어가는데, 장애인에게는 나이 기준을 없애거나 낮추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에요. 65세 미만인 장애인 한 분께 틀니를 해드리려면 65세 이상 대상자분들 열 분 이상한테 해드릴 수 있는 비용이거든요. 인원도 중요하잖아요. 그럼 이 안을 받기가 어렵죠. 그래서 그러면 일단 한 명만 하자, 이렇게라도 밀고 있어요. 그게 재작년부터예요. ‘한 명만, 한 명만 넣자’, 하고.

그럼 사실 보험 수가를 바꿔야 되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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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보험 수가를 더 늘려야죠. 근데 그러기에는 또 보험 재정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장애인이 아니라도 지역에는 자활센터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보건소에서도 잠깐 일했는데, 자활센터 분들은 보건소 사업으로 진료를 해드려요. 이분들께도 구강관리가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진료해보면 틀니가 필요한 사람이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무료틀니 대상 나이가 아닌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걸 자꾸 제안하는 거예요. 그럼 예산을 늘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하다못해 시에서 한 해에 다섯 명 씩만 넣어줘도, 그럼 10년이면 50명이잖아요. 그니까 계속 제안해요. 그런 걸 하는 단체예요. 그리고 그거는 이제 치과의사로서 하는 일이고, 그건 의사 한 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또 이 사회에 속한 개인으로서 사회 활동에 대한 욕구가 당연히 있잖아요, 사회 구성원이니까. 그런 일들을 찾아서 건치의 이름으로 연대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직접 결합해서 피켓팅을 할 수도 있고, 후원금을 보내기도 하고, 그런 연대활동을 해요. 그런데 이 사회활동이라는 것도 굉장히 분야가 다양하잖아요.

그렇죠.

환경, 정치, 빈곤, 페미니즘… 그 중에 어떤 것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둘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따로 없어요. 그래서 그걸 매번 회의에서 결정을 하니까…(웃음) 많이 가져오면 많이 할 수 있는 거고, 왜냐면 우리가 거의 ‘No’는 안 하니까요. 그런 식이죠. 우리 부경지부에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직원이 있었어요. 그런데 음…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많이 됐잖아요. 제가 88학번인데요, 제가 건치에 들어올 때는 한 해에 18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명도 안 들어와요.

정말로요? 

그러니까 재생산이 안 되는거야. (웃음) 재생산이 안되면…? 재정이 줄어들지요.

분명히 새로운 치과의사들은 많이 생겨나고 있을텐데, 

근데 건치에는 안 들어오지. 어떻게 보면 이제 지금은 치과의사로서의 특수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은 나름대로 많이 된 부분이 있단 말이에요. 보건소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잘 되어 있고 공공 부문이 좀 되고 있어요, 치과계는, 메디컬 전반과는 달리. 그러면 지금 이 시절에 건치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남아 있다는 거죠. 근데 날이 갈수록 그 관심이 떨어지는 거죠. 개인이 살아남고 살아가는 일에 더욱 집중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돼 버렸으니까요. 더 개인적인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고, 무찔러야 하는 정권이 있던 시절이랑은 또 다른 것도 있겠고요, 물론 이번 정부가 안 그렇다고는 말 못하겠지만요.

건치 회비가 한 달에 5만원이거든요. 그런데 치과의사들을 포함해서 요즘은 다들 어려운 거예요. 지금은 제가 개업하고 결혼했던 비용의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나요. 개업을 할래도, 결혼을 할래도. 그런데 지금 또 경쟁사회니까 도드라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잖아요. 그러면 어항이라도 하나 더 갖다놓아야 되는 거예요. 그 어항 하나 관리하려면 매달 60만원 줘야 해요. 너무 힘들어. 자기가 야간진료까지 매일 한다면서 ‘선배님 나 너무 안 행복하다’ 이러는 거야. 자기가 죽어라고 일하는데 통장에 돈이 없대요.

(웃음) 어떻게든 돋보이기 위해서 어항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불안함,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현실이 참 무섭고 가혹한 것 같아요.

치과 장비는 변한 게 없거든요. 내가 개업했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비는 오히려 값이 더 떨어졌죠. 수요가 더 많아지고 장비제조사들도 경쟁을 하니까. 그런데 그 밖의 자기 개인 경비가 많이 드는 거예요.

경쟁 시대가 되어가지고. 

결혼도 하려면 집이 있어야 돼.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그러니까 이제 그런 여러 가지 변화가 수반돼서 한 해에 한 명도 안 들어와요. 재생산이 안 돼. 그러니까 우리도 다 알아요, 사무실에 상근 직원이 있으면 훨씬 사업이 잘 돌아가요. 왜냐하면 다른 지부에서 무리하게 계속 상근 직원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20년 전에 들어온 직원이 20년 넘게 잘하고 있는데, 나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지부도 있어요. 그런 지부는 여전히 잘 돼요. 뭐든지 잘 돼죠. 상근자가 있으면 회원을 만나도 한 달에 몇 명씩은 꾸준히 만날 수 있잖아요.

지속 관리가 되니까. 

그쵸. 근데 우리는 있는 사람만 그냥 남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그냥 ‘힘 빠지지 말자. 우리가 지금 버티고 있는 게 어디냐.’ 그러고 있어요. 버티고 있는 거예요. 상근직원이 없은 지가 한 5년 된 것 같아요. 최저임금 오르기 전까지는 있었거든요. (웃음) 최저임금이 약간 현실화되려고 애쓰기 전까지는.

(웃음) 아아. 다 이루지도 못한 최저임금 정상화 앞에서 눈물과 웃음을 함께 지어봅니다… 처음에 건치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신 거예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우리는 여학생실이 따로 있었어요. 우리는 과 하나가 단과대라 우리 건물에는 우리 과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끼리만 놀고 그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굉장히 폐쇄적이죠. 여학생실에 딱 가면 애들이 어제 쇼핑한 거, 어제 남포동 나간 거, 어제 화장품 산 거, 이런 얘기밖에 안 해요. 저는 잠을 많이 자요. 저는 그냥 집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자는 거예요. 특별한 일이라고 해봐야 남자친구랑 잠깐 연애하다가 집에 가서 자고. 그게 다거든요. (웃음) 화장품 얘기, 옷 얘기를 할 게 없어요. 저는 그때도 화장을 안 했거든요.

대화가 안 맞았겠다. 

대화할 게 없어요. 친한 친구야 몇 있지만 여학생실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할 말도 없지만, 듣고 싶지도 않아.

그쵸. 재미없죠. 내 관심사가 아니니. 

그런데요, 선배들이 하는 얘기는 들을 게 너무 많아. 너무 재밌어. 그리고 난 신문도 잘 안 봤거든요? 그런데 사회 돌아가는 얘기를 선배들이 계속 해주잖아요, 그게 욕이든 뭐든. 그게 재밌었어요. 얘기가 재밌으니까 모임에 가고 싶은 거지. 어려운 책을 읽고 공부를 하자고 해도, 가서 들을 게 있잖아. 내가 제일 후배기 때문에 말은 잘 안 시키거든. 그게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렇다보니 후배로서 오래 있었죠.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후배인 채로 있다가 졸업해서 나오니까 건치에서도 제일 후배잖아요. 건치 선배들은 다 이미 자리를 잡았고. 70년대 학번도 있으니까. 그런 시절을 다 겪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고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저는 심지어 군대이야기도 재밌었어요. 재밌는 모임에서 이거 하자니까 신나서 하는 거지. 그땐 정말 남포동 이런 데 가서 캠페인 많이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IMF가 터져버려서 노숙인 진료하러 다니고. 재미있어서 모임에 가게 되는 거야. 내가 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저는 학생운동이나 이런 거 전혀 몰랐어요. 한 번은 보수동에서 집회를 했는데 그 시위대가 너무 무섭더라고. 최루탄 막 빵빵빵 터뜨리고 도망가고 눈물 콧물 나고. 처음 집회 갔을 때 그때 깜짝 놀랐죠. 그런데 그 운동권 우리 85학번 선배가, 자기도 너무 무섭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 ‘아, 이거 많이 해봐도 무서운 거 맞구나.’ 싶었죠.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까, 정말 94년 졸업이라고 하셨으니까. 치과 운영 중에 IMF가 왔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IMF 안 탔어요. 그 정도로 잘 됐어.

 IMF 때 IMF를 안 탔다는 건 정말 찐잘됨이네요. (웃음) 

엄청난 일이었으니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치과 운영에서 그걸 실감하지는 못했죠. 나는 그냥 계속 열한시까지 야간진료하고. (웃음)

이렇게 인순 파친님이 가장 마음을 쓰고 계신 건치와 건치 부경지부 이야기를 좀 들어봤고요. 이제 다음 질문인 어쩌다 파친이 되셨나요~ 하는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정 대표 때문이죠.

사실 지금까지 제가 인터뷰한 분들 모두 ‘어쩌다 파친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 일답입니다. 정귀순. (웃음)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이 인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궁금해요. 

아, 그건 굉장히 먼데.

한 번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웃음)

제가 1994년에 졸업하고 나서 개업을 하고, 치과를 약간 다르게, 일반 치과랑은 약간 다르게 운영했어요. 치과 개업을 선배랑 같이 했는데, 치과를 열던 그때는 사회가 지금하고 많이 달랐거든요. 30년 전이잖아요. 예를 들면 어린이집 아이들 이빨 검사를 한 해에 한 번도 안 했어요. 지금은 매년 한 번씩 하거든요. 왜냐하면 그건 시절이 달라서기도 한데, 그때는 지금처럼 다들 어린이집에 보내지는 않았거든요.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직장 안 다니는 엄마들은 굳이 어린이집에 안 보냈던 거예요. 요즘은 지원금이 많잖아요. 그때는 그냥 내가 애를 맡길 데가 없을 때 내돈 내고 보내는 식이었고, 공공서비스에 해당하는 게 아니다보니 당연히 어린이집에서 치아검사하고 하는 일은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제 치과에서 부산 시내에 있는 어린이집한테 신청을 다 받아서 무료로 검진을 하고 부모 교육까지 했어요. 엄마들이 알아야 애들을 올바로 이닦이니까요.

그리고 회사들에 가서도 그런 교육을 했어요. 그때는 사상 공단이 컸거든요. 지금은 사상공단이 다 죽었지만요. 거기 가서도 노동자들 검진하고 교육도 하고요. 장애인도 마찬가지고, 원하는 곳은 전부 했죠. 그리고 학교에서도 원하면 교육을 했어요. 학교에서 건강교육은 주로 보건선생님한테 맡겨져 있는데, 원하는 곳에서는 하기도 했죠. 저희가 진료만 한 게 아니고 그런 일들이 많으니까. 검진도 굉장히 많았고, 교육도 많았고…

이미 어떤 조직이나 연대체이기 전에 공익 활동을 하고 계셨네요.

그때 이제 우리의 모델이 된 게 푸른 치과라고 사상에 있는 곳인데, 그게 건치에서 만든 치과였어요. 그때 건치에서 전국에 치과를 만들었었어, 노동자치과. 그걸 배운거죠. 우리한테는 전설적인 치과죠. 학생 때 탐방을 갔었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푸른 치과에는 이미 일하는 선배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면 거기는 사상이니까, 나는 반대쪽인 이쪽에, 동래권에 만들자. 그런 생각을 선배랑 했던 거죠. 우리 둘이서 다 빚내가지고 치과를 만들었어요. 여기서 난 수익을 가지고 직원들 월급 주고 우리도 월급제로 월급만 받고 나머지는 빚갚고 그랬죠. 그런데 빚도 엄청 빨리 갚았어요. 왜냐면, 너무너무 잘 됐거든. 부산 시내에서 세금 일등 내고, 막. 선배들이 막 너네 뭔데 세금 일등 내노. 얼마나 벌었는데, 막 묻고.

돈 욕심 없이 이렇게 무료 검진해 주고 하는데?

 그니까

오히려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 몰리는구나. 

이렇게 하면 이 안 썩는다고 가르쳐주니까, 이게 뭐지, 하고 오는 거지. 돈 엄청 벌었어요, 진짜. 그때는 부산 시내에서 야간 진료하는 치과가 푸른 치과 딱 하나 있었어요. 그 다음이 우리였고요.

와, 야간 진료라는 개념이 없었던 거군요? 

야간진료를 왜 해, 사람들이. 왜냐하면, 그때는 돈이 있어야 치과를 가니까. 돈 있는 사람은 다 낮에 시간 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야간에 진료가 필요가 없어.

애초에 개념이 그렇게 잡혀 있었군요. 

당연하지.

 ‘무슨 밤까지 노동자를 위해서 치과를 열어!’

 ‘치과를 올 수 있는 사람만 오면 돼지. 내가 왜 일 마치고 오는 사람을 기다려줬다가 봐야 돼?’

그렇구나, 그렇구나.

부산시내 그때 치과가 천 개였거든요. 우리 치과가 생기기 전까지는 야간진료하는 치과가 부산에 푸른치과 딱 하나였어요. 딱 하나,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그때도 이미 저는 건치 회원이었고 그때 건치는 진료 사업을 엄청 많이 할 때였어요. 장애인거주시설 같은 데는 되게 크고 사람이 많은 데도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방 하나를 내달라고 해서 그 방 하나에 치과 진료실을 딱 차려요. 그렇게 몇 달 동안 거기 사람들을 치료해요. 100명이면 100명을 전부 다 검진하고 치료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이제 다른 복지관이나 다른 시설로 또 가는 거예요. 그럼 거기 또 매주 일요일마다 진료를 나가요. 그게 다 건치에서 하던 일이에요. 지금은 있는 정부정책, 구강보호 정책들이 다 없을 때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그걸 계속 나갔어요.

거의 진짜 민간에서 피워낸 거네요.

 건치가 그런 역할을 해왔어요. 30년 전부터.

그럼 평일에는 병원 진료를 하고 일요일마다 진료지원을. 

그쵸. 왜냐면 그때 주 5일제가 아니었잖아요.

아 맞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병원 진료를 보고, 일요일에 지원 진료를 보신 거네요. 그야말로 월화수목금금금의 삶을 사셨네요. 

그런데도 봉사하는 치과의사들 많았어요. 왜냐하면, 의미를 찾아야 되잖아. 내 치과는 돈버는 치과인 거고. 거기서 내가 아무리 마음껏 해줘도 그 마음에 소통이라는 게 항상 애달픔과 모자람이 있는 거예요. 그걸 일요일날 거기 가서 푸는 거지. 그때 ‘이주민과 함께’가 생긴 거예요. 그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름은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이었고, 전포동에 생긴 거예요. 그때 제 치과가 양정에 있었거든요. 정 대표의 특징은 뭐냐면, 내가 5년 만에 정 대표를 만나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얘기해. 약간 그런 스타일이에요. 나는 5년 만에 처음 정대표를 만난 거지만 정대표는 지금 자기가 제일 관심가지고 있는 사안에 대해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때 정대표가 막 사업을 하고 이것저것 하고 좀 어려울 때였는데, 사무실에 갔더니, 외국인 노동자 얘기를 하는 거죠. 저한테는 그전부터 이미 정대표가 멋있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때 당시에 박순보 선생님이라고 있었어요. 알아요?

몰라요. 

전교조 선생님인데 1992년도에 부산시장후보로 나왔을 때 그땐 정말 부산에 있는 모든 NGO가 달라붙어서 선거 운동을 했거든요. 지금이랑은 분위기가 완전 달랐어요.

시민 후보로 밀었군요. 

그때 전부 다 거기서 자원봉사하고 그랬거든. 그때 정책 담당자였어.

정대표님이요? 

그래갖고 발표하는 거 듣고 내가 ‘저런 여자도 있구나.’ 하고, 그게 제 첫인상이에요. 박순보 선생님 선거사무실에서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고 담담한 말투로, 엄청나게 많이 모인 사람 앞에서 뭘 해야 되는지 설명하는 걸 봤던 게 제 첫 기억이고, 그때는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았죠. 그러고나서 한참 있다가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에 제가 후원회원이었나, 그래서 거기를 제가 갔나, 아니면 전화가 왔었나, 그건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게 우리 둘의 첫만남이었죠. 갔더니 ‘우리 진료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외국인노동자들, 치과 갈 시간이 없단다.’ 그때는 좀 어려운 관계였겠죠. 저는 필요한 일이면 건치는 한다고, 다른 데랑 마찬가지로 사무실 안의 방을 하나 비워달라고 해가지고 치과를 만들었어요. 그게 97년이에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방을 하나 비우고 장비를 싹 채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우리 치과로 사람들을 실어 왔어요. 치과에는 이미 다 세팅이 돼 있으니까요. 모든 게 다 있잖아요, 병원이니까. 그리고 전포랑 양정이니까 완전 가깝잖아요. 한 코스잖아, 그러니까 다 실어와서 진료를 봤었죠. 그때는 필리핀 사람들이 많았어요. 테스라고 필리핀 친구가 그때 역할을 많이 해줬죠. 늘 나와서 통역해주고 했죠. 영어 잘하니까.

와 그때의 테스님이면 진짜 젊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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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뭐 날라다녔죠. 며칠 잠을 안 자도 뭐. 나도 젊었고. 그때 우리가 30대 초반, 20대말, 이랬으니까. 그래서 이제 제 후배들도 우리 치과로 다 오는 거예요. 진료 도우러. 그렇게 사람들 실어오다가, 사실은 그게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시설은 치과만큼 좋지는 않지만 사무실에 방 하나 내서, 기본적인 건 다 가능한 치과 의자 하나 놓고, 이렇게 했죠. 의사로서는 치과에서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완전하거든. 진료소라는 게 한계가 많죠. 좁기도 하고. 다 안 익숙하니까. 근데 그래도 인권단체에 진료소를 만들어서 하는 게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필요하지요. 그렇게 시작한 진료소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그 인연이 여기까지 온 거죠.

그리고 제가 새날치과를 만 6년을 하고나서 제가 치과를 그만뒀죠. 몸이 너무 안 좋아가지고. 저는 그 6년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남들 60년 할 거 했달까. (웃음) 나만 그렇게 생각해. 치과를 운영할 적에 그 비용을 공용으로 남겨뒀었거든요. 우리가 월급제였으니까. 제가 그렇게 만들어왔고, 그때는 멤버들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그만두면서 그 비용을 털었고, 이 돈을 어디다 쓸까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정대표가 하던 외국인노동자인권모임에서 아름다운 재단에 활동가 프로그램 공모를 넣었는데 떨어졌다는 거예요. 하필 내가 만나러 간 날 민정씨라고 있어요, 그루, 그루가

 김그루 선생님? 

그루가 정대표랑 그 이야기를 막 하고 있는 거예요. 대표님이 기차비 들여가지고 거기까지 면접보러 갔다왔는데 비타민 이거 하나 준다면서, 떨어졌다면서, 이게 뭐냐면서 막.

그 얘기를 내가 들은 거지. 그래서 대표님, 그 프로그램 한 번 봐봐요, 해서 프로그램을 봤더니 프로그램이 너무 좋은 거지. 이 활동에 지친 활동가가 해외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해외를 가서 놀면 어때요, 그쵸? 근데 해외가려면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돈이 너무 드니까 단체에서 지원을 못 해주잖아. ‘대표님, 이거 내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민들레기금이에요. 그게 이제 정대표랑 같이 한 거잖아. 그러면서 정대표 옆에 계속 있게 된 거지.

그러면 민들레 기금은 선생님의 6년 간 새날치과 

네, 새날치과 돈 중에서도 일부, 그리고 그 돈이 민들레기금 중에서도 일부였죠. 처음에는 제가 낸 돈이 전부였지만 그 6,000만 원만 쓰고 원래는 털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붙었죠. 이 사업이 워낙 의미있으니까. 정철상 선생님이 참여하시면서 기금이 풍성해진 거죠.

그리고 부산에 장학문화사업회라고 있어요. 열사회에. 민주노총 안에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 2억 기부하고. 왜냐면 제 환자 중에 아주 많은 분들이 노동자분들이었고, 그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계속 죽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제 환자 중에 유가족분들도 계셨고요. 박종철 열사 아버님도 우리 치과에 오셨어요. 이렇게 여기저기 활동을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치과에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또 다시 더 사회적 책임감이 생기고. 김지도도 왔었어요. 김지도가 우리 치과에 치료받으러 온 날 얼마나 덜덜 떨면서 치료한 줄 알아요? 이 사람이 우리 치과에 왜 왔지? 너무 떨려가지고 원장실 가가지고 한 숨 몰아쉬고. 박종철 열사 아버님 오셨을 때도 편안하게 치료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손이 더 떨리고. (웃음)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게 번 돈을 그냥 나를 위해 쓰거나 할 수는 없는 거지. 치과를 딱 정리했을 때, 그때가 2000년대 초였는데, 그때 제 손에 남은 돈이 몇 억이었어요. 그래서 그중에 2억을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 장학금으로만 써달라고 냈죠. 그때 박창수 열사 사모님하고 박종철 열사 아버님하고 다 나한테 고맙다고 회의에 초대해가지고 안아주시고 그랬거든. 나는 너무 죄송했지. 나는 정말 돈 밖에 한 게 없는데 그분들 마음에는 고마웠던 거야. 그래 가지고 회의 오라고 하셔서 갔었고, 그 장학사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장학사업을 하기 위한 열사장학문화사업회가 따로 만들어졌고요.

근데 2000년대 초에 2억이면 진짜 큰 돈이잖아요. 

큰 돈인데 그래도 장학 사업을 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죠. 그리고 어쨌든 돈이 몇 억씩 내가 계속 들고 있는 건 안 맞다고 생각했고. 그게 한 20년 됐나보다.

선생님은 원래 별로 사사로운 욕심이 별로 없으신 분이에요?

아.(웃음)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우리집이 되게 가난했어요, 어렸을 때. 겨우겨우 살았거든요. 왜 있잖아, 중학교 때도 등록금 안 낸 사람 맨날 칠판에 이름 적히고, 제가 그랬거든요. 근데 그게 부끄럽다기보다는 그냥 가난했어요, 집이. 아빠 일 안 하셨고, 일하는 거 싫어했고, 엄마가 이제 일하시고 이러니까. 근데 내가 치과 대학을 간 거예요. 엄마가 너무 바라셔서 그냥. 그때는 또 사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만 잘하면 갈 수 있어서 갔어요. 공부는 그냥 학교 가는 게 싫지 않았기 때문에. 용돈도 없으니까 갈 데도 없거든요. 돈 쓸 데도 없어. 그래갖고 이제 학교를 갔는데 치과의사가 된다는 거죠, 여기를 졸업하면. 뭔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절차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면허시험 치고. 그걸 되게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딱 그때 건치를 만난 거지. 건치 선배들을 본과1학년 때 만나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개념을 엄청나게 배웠죠. 그런데 그게 머리에 하나도 안 남아있어요. (웃음) 너무 어렵거든. 내가 아주 가난한 집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 건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안 거지.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니까, 갚으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거다.

그럼 어떤 힘으로 치과의사가 되셨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누군가가 희생해 준 거잖아요, 나를 위해서. 누군지 몰라요. 누군지 모르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걸 이렇게나 누군가들이. 예를 들면, 내가 그때 개업한다고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갔어요. 우리 집이 정말 가난했거든요. 정말 가난까지는 아닌가, 그래도 세끼 밥은 먹고 살았으니까. 밥은 먹고 살았어. 근데 은행에서 면허증을 딱 보고 돈을 확 빌려주는 거예요. 날 뭘 보고 빌려줄까.

면허증을 보고… 

왜? 그럼 면허증이 없는 사람은?

안 빌려주겠죠. 

왜? 그건 결국 면허증을 안 가진 사람이 가져야 할 권리를 내가 다 갖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나는 뭘 해야 할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가진 특권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하셨군요.

맞아, 맞아. 나는 그걸 특권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저기 노점상 하시는 분한테는 1억 안 빌려줄 걸, 나한테 빌려주네? 그럼 나한테 특권을 준 거잖아. 별것도 아닌 면허증 가지고. 내가 특권을 누린 만큼 나는 다른 뭐라도 줘야 한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계산이니까. 언제나 어딜 가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특히 개업을 하면 원장님이라고 엄청 치켜세워주잖아. 그런데 건물 청소하시는 분한테는 그렇게 해? 안 해. 그분이 받을 권리를 내가 다 받고 있는 거지. 그니까 부채의식이 있었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 그걸 그냥 늘 생각하는 거야. 젊은 시절은 그걸로 그냥 다 보냈어.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냈고. 치과 끝나고 집에 바로 간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항상 회의가 있거나 그래가지고. 그때는 회의가 많았고, 그런데도 오히려 연대사업 회의 다 갔어요. 일주일에 회의가 6개씩 있고, 토요일까지 일하고, 매일 회의있고, 일요일에는 캠페인이랑 진료지원, 그렇게 6년 살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게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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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조금 숨찬데요. (웃음) 

하나도 안 지쳤어요. 그렇게 쏟아붓고 나서 딱 6년 뒤에 나가떨어졌지. 음, 그런데… 제가 치과에서 환자를 만나면 그 개인을 알게 되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는 거야. 내가 100만 원, 300만원 깎아주면 뭐해. 그런 사람이 넘치잖아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해도 해도 해도, 끝이 없어. 그때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런 구강보건에 관련된 제도가 없었어요. 우리 선배들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 일이잖아, 우리가 열심히 하고 있잖아’, 하고 격려해주지만, 나는 거기서 진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하셨군요. 

너무 아득했어요. 무료로 해주고 계속 지원해주고 그러면 되죠. 나는 월급만 받으면 되니까. 저 월급 300만원 받았거든요. 300만원이면 많잖아요. 그러고 나도 치과에 잉여금이 많으니까 그걸로 사람들 다 무료로 해주면 돼.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까지. 언제까지. 사연은 끝이 없어. 열한 시까지 야간 진료를 해도 못 오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야간 진료를 화, 목 이틀을 했는데 열한 시에 끝나.

진짜, 진짜 야간이네요. 제가 아는 야간 진료는 7시, 8시까지 이런 건데. 

아침 아홉시부터 했어요. 그러면 이제 직원들이 너무 힘들지. 그래서 야간 직원을 따로 운영했죠. 우리야 뭐 지가 좋아서 하는 거지만 직원들은 그렇게 하기는 너무 힘드니까. 어쨌든 그런 힘으로 버텼지만, 그런 방식으로 힘을 내는 게 한편으로는 저를 지치게 하기도 했던 거죠. 건치는 건치대로 정책제안하고 저도 함께 하지만 그건 예를 들면, 아동주치의하는데 9년 걸렸으니까요. 9년을 기다려야 되는 거야. 지금이야 9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지, 그게 될 때까지는 얼마나 버텨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계속 버티는 거니까. 그게 제도화될 때까지 계속 진료실에서 맞닥뜨리는 게 참 막막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그런 사람이 못 됐던 거지. 그래서 그냥 미련 없이 그만뒀어요.

그러고 나서 치과 활동을 다시 하지는 않으셨던 거예요?

안했어요. 아, 보건소에 간 적은 있죠. 사상구 보건소에 2년 있었고, 동래구 보건소에 최근에 2년 있었고. 그게 다예요. 제 치과의사로서의 이력은 그게 다예요. 보건소는 제가 항상 일하고 싶었던 곳이었거든요. 거기는 아무래도 공공의 영역이니까. 그 부분 때문에 일해보고 싶었던 건데, 그 조직이 나랑 맞지는 않더라고요, 나도 맞출 수도 없고. 한 군데에서는 맞추려는 노력도 안 했고 한 군데에서는 내 식대로 해보려다가 아니구나 하고 나왔지. (웃음) 내 식대로 마음껏 해봤어요, 거기서.

선생님은 항상 후회 없이 딱 할 만큼 다 해보시는 편인가봐요?

그러게, 그런 편인 것 같아요. 그냥 그러고 나가면 그냥 끝. 안 돌아보는 타입. 안 돌아보고 싶고.

개운하네요. 멋있다!

그러다가 이제 정 대표가 파랑을 만든다고 해서 파랑도 함께하게 된 거죠. 정 대표가 안 했어도 인권플랫폼 파랑이랑 인연을 맺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해봐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이제 정 대표가 걸어온 길을 알고, 정 대표가 사람을 대하는 모습, 그리고 또 일을 하는 모습… 여러 가지를 많이 갖췄잖아요.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같이 하자 했을 때 안 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인권인데. 그래서 같이 하게 됐네요. 다 관계 속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단체를 바라볼 때. 제 요즘 고민은 좀 더 많이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는데 막상 지금 제가 에너지가 엄청 많은 시기는 아니다보니 스스로 좀 갑갑한 마음이 드는 것? 이런 저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제가 건치에 애정과 고마움이 큰 만큼 왠지 미안한 것 같아요. 더 잘 하고 싶어서. 제 인생은 건치를 빼고 생각할 수 없거든요. 그니까 나는 약간 다른 건치 회원들하고도 좀 다르다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약간 그런 부분에서 사람들이 놀래요. ‘건치가 뭐길래, 몸담고 있는 조직 중에 하나 아니야?’ 그렇지만 저는 학교에서 만난 건치 선배들을 통해서, 그렇게 건치를 통해서 내 자리를 알게 됐고, 건치에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웠고, 학교를 졸업했을 때부터 건치로서 계속 활동을 했으며, 건치 회원으로서 하는 활동이 치과 활동과 연결됐고… 그럼으로써 나는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거든요. 나만큼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치과를 운영한 사람이 없을 걸요. 설령 그게 내가 활동한 것에 대한 보답이나 댓가였다 하더라도, 내가 한 활동에 대한 반작용이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내가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건치를 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근데 내가 후배일 때 만났던 그때 그 선배의 모습이 나는 되어있지 않은 거죠. 같이 집행위 하는 막역한 후배들이 아무리 괜찮다고 저한테 눈빛을 보내도, 내가 괜찮지가 않은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2년 전에 제가 대표를 한 것도 할 사람이 없어서 한거거든요. 조병준이 정말 잘하거든요. 굉장해요. 근데 조병준도 이제 더 이상 못할 상황이 온 거예요. 그러면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떡해, 사무실장인 내가 해야지. 내가 역량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사실 리더십은 없거든요.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난 너무 잘 따라갈 수 있어. 난 나를 그렇게 규정하는데, 잘 따라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리더는 나한테 정말 맞지 않는 일이에요. 잘 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고, 단 한 번이라도 원한 적이 없어요. 근데 지금은 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제가 사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해본 적이 없거든요. 늘 좋아서 뭘 했지. 건치도 그렇게 해왔고요. 그런데 지금은 해야 되는 상황이야, 그러면 또 기쁘게 해볼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침 또 제가 아주 잘 해낼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거죠.

하기 싫다기보다는,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꼈던 일을 이제 어떤 책임감이나 소속감으로 하고 계신데 

신나게 할 수 없지.

때때로 부담스럽고 

때때로 아니에요. 무지하게. (웃음)

얘기 들으면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건 정말 인순 파친님께 여러 가지 정체성들이 있으시겠지만, 가장 큰 정체성은 활동가서로서의 박인순, 그 중에서도 건치의 박인순이라는 거네요. 

그럼요. 그게 제일 커요.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공통 질문 두 가지를 남겨두고 있는데요. 먼저, 인순 파친님께 인권이란?

인권. 인권은 너무 중요하죠. 너무 소중하고 진짜 공기 같은 거죠. 없으면 너무 금방 느껴요, 숨막히죠. 근데 있는 사람은 그걸 못 느껴. 누리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 있잖아요, 공기처럼.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인권, 누구나 인권을 누려야 된다고 하지만 학생인권, 어린이인권 관련 자료만 읽어봐도 우리가 안 지킨 게 너무너무 많은데, 누리는 사람은 너무 공기 같은 거라서 없는 사람이 어떨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공기를 의식하지 않고 살듯이, 

응응,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참 어려운 거 같아. 내가 그걸 언제 느꼈냐면 우리 그때 차별금지법 임기 내 제정하라고 부산민주당사 앞에서 텐트 농성할 때, 그때 인터뷰할 때, 그때 되게 직접적으로 느낀 것 같아요.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이성애자가 동성애 인권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는 게 정말. 우리가 사고가 나면 알잖아.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10.29 참사에서도 보면, 사람들이 참 무심코 하는 말들, ‘놀러 안 보내면 되지.’ 그런데 놀러 안 보낸다고 지켜질 수 있었던 인권이 아니었던 거잖아. 나의 안전은 사실은 당연히 지켜져야 되는 인권인데, 그게 안 지켜진 건데, 니가 거기 가서 그랬다고 얘기하는 거는… 그런 데에서 나는 약간 그런 게 느껴져요. 특히 성소수자에게 이 사회는 너무 많이 그런 것 같아요. 그게 사실은 퀴어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건데. 그게 되게 안타까워요. 제가 요즘 제일 마음 쓰이는 인권 문제는 퀴어인권이에요.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틀렸다 글렀다 하는 거잖아. 내가 나다운 내 모습으로 살겠다는데. 그게 누구를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살겠다는데, 왜 그러는 걸까.

사실 눈 뜨고 있는데, 왜 눈 뜨냐고 하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러니까요. 그건 정말 치욕적이야.

정말 내밀한 모독이죠. 

엄청난 거지. 나는 국민의 힘 사람을 만나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거든요. 물론 내가 민주당 지지자는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정의당의 모든 걸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이제 ‘상식’, 상식적인 사회를 원할 뿐이지. 내가 누리는 걸 다 같이 누렸으면 좋겠거든요. 그런데 보수정당 사람들을 만나서 울타리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로 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거로도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나도 이 정도인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집 밖을 나가기 얼마나 힘들까. 물론 그래서 더 단단해지게 되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제발 그런 공격 안 했으면 좋겠어. 냅둬. 내비둬 줬으면 좋겠어요, 서로 다르면. 다를 수도 있잖아.

항상 자기랑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그래서 공격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애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애가 한참 자라고 있고 너무나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이 부모고, 그리고 학교생활이 자꾸 많아지면서 그 아이가 자기자신을 형성해 갈 거잖아요. 우리 딸은 다행히 엄청 수다스러워서 엄마한테 다 물어봐. ‘엄마, 이건 왜 안 되는 거야. 이건 왜 되는 거야. 이거 좋은 거야.’ 물어보니까 고민이 많아지는 거지. 어떤 대답을 해줘야 아이가 치우치지 않고 여러 관점을 고민해보며 자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 내가 애를 안 낳으려고 그랬거든. (웃음) 나로 사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인간 하나를 옆에서 오롯이 지켜봐주고 돌봐야 한다는 게. 이 인간이 나에게서 영향을 너무너무 많이 받고. 그래서 내가 애를 안 낳으려고 했는데. 난 지금도 비추예요. 짝지가 너무 원해가지고.

(웃음)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너무 사랑스럽던데요. 

지가 그런 줄 알아. 하도 귀엽다 해가지고. 큰일이야.

(웃음) 뭐가 또 큰일이에요. 

공기 같은 인권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마지막으로, 이제 요것은 우리 파친님을 파랑에 좀 더 쓱 땡기기 위한 꼬시기 질문 같은 것인데, 파친님은 파랑과 어떤 친구 사이가 되면 좋을까요, 하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죠. (웃음) 파랑에 유용한 사람. 파랑이 가려고 하는 길에 후원회원으로서, 파랑이 하는 일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유용한 사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져요. 사회에서도 내 역할을 잘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한 인간으로서. 왜, ‘강아지똥’ 얘기 있잖아요. 왜 똥인데 땅에 스며들어서 자기 역할을 다 해내잖아요. 강아지똥에 나오는 그런 똥 한 톨 같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 좀만 기다려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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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그렇다면 선생님은 왕똥이에요. 무척 겸손하게 말씀해주시니까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선생님은 요즘 선생님 삶 속에서 움직임이 조금 덜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파랑에서 선생님을 만날 때 선생님만의 따듯함과 큰 힘을 느꼈었거든요. 그리고 일단 무엇보다도 선생님 눈을 보면 마음이 너무 편안해지거든요. 

나 요즘 현지씨 볼 때 눈이 제일 반짝이잖아.

어머나. (손가락 하트) 그리고 또 벌써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 우리가 이미 같이 하고 있는 사업도 있고, 지금 같이 준비하고 있는 내년 사업도 하나 더 있고요.

그게 제가 어떻게 해서라기보다는, 건치는 아주 민주적인 단체라서 다같이 의논하고 결정하거든요. 의미있고 필요하고 건치에서 잘 할 수 있는 사업이니까 함께 하는 거죠. 사실 제가 활동력이 엄청 떨어진 상태에서 엄청 큰 일이라 부담이 있지요. 지역 운동의 활동가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아니까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덥석 받았는데, 지금 건치의 품이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보다는 조금 덜하니까, 그런 부담은 조금 있죠.

함께 할 일들이 하나씩 생겨나서 저는 사실은 기쁜데. 좀 더 자주 뵐 수 있잖아요. 제가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편이라. (웃음) 

아유, 난 걱정이야.

그렇지요. 저희도 잘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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