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파친코 7화 / 정민석

언론·기고

[파친코] 따듯함이 몽글몽글 모여 사람이 되면 그건 아마도… 정민석 파친님!

이번 달에는 인권재단 사람,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PL사랑방의 운영을 함께 돌보고 있는 조직가이자,
파랑의 든든한 자문위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권활동들의 곁이 되고자 하는 활동가, 정민석 파친님을 만났습니다! 

민석 파친님은 12년 가까이 인권운동 지원조직의 실무자로 일하면서 쌓은 비영리 모금과 인권운동 조직의 딴딴한 경험을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나누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파랑이 가장 많은 자문을 구하는 분 중 한 분이시기도 하지요!
자문을 핑계로, 인터뷰를 핑계로, 이런저런 핑계로 민석 파친님을 만나면 늘 큰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마음도, 말씀도, 그 미소도… 따뜻하다 따듯해!

두루두루 마음을 나누고 사람과 조직을 돌보느라 바쁜 민석 파친님이 파랑 연구보고회 토론자로 부산에 오신 날, 잠시 틈을 내 파친코 인터뷰를 하자고 옷깃을 당겨보았습니다.

오늘 연구보고회 함께하러 와주셨다가 막간에 잠깐 시간을 내주신 거라 이번 인터뷰는 조금 짤막하게 진행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저도 서둘러 볼게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민석 파친님!

네에, 파랑의 친구 정민석입니다. (웃음) 너무 좋아하는 파랑의 친구!
저는 인권재단 사람에서 올해로 한 12년 정도 일한 정민석이고, 사무처장 일을 하고 있구요.
뭐, 그 외에도 인권 이슈 안에서 성소수자 인권이나, 반빈곤 활동이나, 특히 이제 HIV 감염인 인권같이 이 안에서도 좀 특별하게 주목하고 또 활동하고 있는 영역들이 있긴 한데, 지금은 인권활동가들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서 동료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함께하는 활동을 주로 고민하고, 많이 하고 있습니다.

소개 감사해요. 파친이자 인권활동가 정민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는데, 자연인 정민석, 인간 정민석은 어떤 사람인가요.

인간 정민석이요? (웃음)

(웃음) 짧은 시간 안에 처장님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한 요행이 지나쳤네요. (웃음) 시간이 너무 없어서 마음이 좀 조급해가지고.

(웃음) 아닙니다. 여튼 제가 20대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후원하는 정도였어요. 그때는 빵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부산에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도넛 체인점의 본사에서 일을 했죠. 아무래도 회사생활을 6,7년 가까이 하다 보니까 저녁에 모임을 가거나 번 돈을 후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활동이라고 생각했죠. 동시에 전업 활동가, 그러니까 밤만이 아니라 낮에도 인권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하는 그런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가지고 있었어요. 30대 초반을 지나는 많은 분들 중에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까, 급여를 좀 적게 받더라도 내가 좀 더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어떨까 하고 마음을 정했던 2011년도부터 인권재단 사람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제가 특히 조직의 안정, 조직의 운영, 이런 데에 좀 관심이 많았어요. 물론 드러내서 활동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사실 그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려면 조직이 잘 안정되어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2013년도부터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고, 그다음에 2015년부터 감염인들의 사랑방을 만드는 모금들을 병행하면서 무언가 계속 이렇게 만들어내고 사람들한테 설득하고, 설명하고, 지지를 끌어내고, 또 이 지지자들과 계속 함께 가는 그런 활동들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계속 해나가고 있는 것 같고요. 또 인권재단 사람에서도 저희는 활동가들의 곁을 지키는 역할을 저희가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되게 소중한 가치, 세상이 조명해주지 않지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계속 좀 드러내고, 자랑하고, 때로는 힘들어하면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런 일들을 좀 많이 하게 되어왔던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까, 부산 지역에서 인권 플랫폼 파랑이 만들어진다고 했었을 때 너무 기뻤어요.

정말로 기뻤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 경험들을 같이 나누는 거에 대한 마음이 사실 시작 때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쓰임이 되든지 간에 서울에 재단이 해왔던 역할 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지역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실험이 반드시 잘 안착되고, 또 부산 지역 곳곳에서 이름 없이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한테 되게 든든한 배, ‘아, 여기 가면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맛있는 거 먹을 수도 있고, 용기도 북돋고, 때로는 무언가 배우고, 친구도 만나고!’ 하는, 활동가들도 그런 것들이 필요하거든요. 근데 어디 가서 그런 무언가를 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어떤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파랑이 준비되고 있던 때부터 지금 이렇게 공간도 꾸리고 아름다운재단 지원도 받게 되고, 또 부산 지역의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서 현황조사도 하고, 이렇게 하나하나 밟아 나가는 걸 보면 정말 파랑 자체가 되게 쓰임이 있는, 부산 안에서 꼭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하는 어떤 단체로 거듭나고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출발 때부터 파랑의 친구가 돼서 개인적으로 영광입니다. (웃음) 

저희도 영광입니다! 다른 직장 일을 하셨다는 건 제가 처음 알았어요. 왜지, 태어날 때부터 활동가는 아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했지. (웃음)

(웃음) 제가 대학 졸업하고 서른 두 살, 그러니까 6년 정도, 처음에는 이제 공장에서 빵을 만들었고, 새벽같이 나가서 케익 만들고 하다가 밤에 퇴근하고 하다가, 도너츠 회사에 들어갔죠. 좀..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애. 그 도너츠가 그 당시에 가장 핫한, 요즘말로 약간 힙한 도너츠였는데, 엄청 달달해요. 사람들이 당 떨어지면 이거를 먹는다고 하잖아요. 

부산에서도 제일 중심지에 있는 가장 큰 백화점 지하에 있었죠. 

맞아맞아! 서면에. 아직도 있나 모르겠네. 그때는 따뜻할 때 아주 달콤한 도넛으로 홍보를 했거든요. 그 도너츠 매장을 늘려나가는 역할을 제가 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달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전업활동가로 살겠다는 결정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큰 결정이잖아요, 그 선택을 했을 적에 마음이 되게 복잡하면서도 한편에선 후련한 것도 있었어요. ‘아 이제 정말 내가 내 인생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서 조금씩 해 나가고 있구나. 이제 내가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구나.’ 스스로 놀랍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렇게 있었죠, 제가. 

와아. 멋져요. 지금은, 좀 달콤한 것 같아요?

아우, 지금도 달콤하지가 않아. (웃음) 초반에는 달콤했는데, 아우, 이… 저는 비영리 현장에서의 활동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뭐 영리랑 비교하기도 하고 하는데, 절대 이것도 쉽지 않고, 사람과 더 부닥치는 일이기 때문에 감정과 에너지 소모도 많은 일이고, 그만큼 되게 가치 있는 일인데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고, ‘너는 네가 원해서 그거 선택한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쉽게 평가받고. 그니까 나의 일, 우리의 일이 사람들한테 되게 쉽게 평가받아지는 것들이 되게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우리 동료들끼리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얘기를 많이 해주는 문화였으면 좋겠어요. 요즘 그런 생각들을 좀 많이 해요.

맞아요. 사실 아무도 안 알아줘도, 내 곁에 있는 동료가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또 하루를 잘 살아낸 기분이 들잖아요. 음, 계속 달콤한 인생을 찾아온 파친님의,

(웃음) 맞아요, 달콤한 인생을 찾아서… 요즘엔 달콤하지가 않아서 좀 그렇지만, 앞으로 더 달콤한 인생을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달콤…한 건 달콤한 도넛을 먹을 때에만 달콤한 것 같습니다. (웃음) 조금 더 여쭤보자면 2011년도에 전업활동가가 되겠다고 결심하시고 나서의 첫 직장이자 지금까지도 한 단체에서 10년이 훌쩍 넘게 일하고 계신 건데요. 왜 인권재단 사람이었는지도 좀 궁금해져요. 

네, 저는 인권운동 안에서도 소수자 이슈에 관심이 많고, 스스로도 성소수자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싶었었는데, 그 당시에도 성소수자 단체들 혹은 소수자 단체들이 경제적으로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그렇다보니까 뭐, 월급 이런 것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리고 저는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현장 안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었던 게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는 일이었었어요. 워낙 가깝게 지냈던 동료 활동가들이 얼마나 어렵게 지내는지를 너무 가깝게 봤었기 때문에, 함께 크고 작은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내가 아예 구성원이 되어서 활동가로 활동하는 건 상상해보지 않았었어. 소수자 영역 안에서 전업 활동가로 있겠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환경, 모금환경이나 후원환경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 내가 그 구성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래도 인권을 벗어나서 내가 환경에 가거나 여성에 가거나 이러기에는 정보도 너무 부족했고, 나는 그거를 배워왔던 사람이 아닌데, 난 과연 그런 거를 취업처럼 잘할 수 있을까? 다른 시민사회에 가서? 사실 그것도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인권 운동 안에서 그래도 소액이라도 월급을 받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잘할 수 있고, 그다음에는 내가 평상시 응원하고 만났던 그런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조직이 어디일까?’ 라고 생각했었을 때 인권재단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권재단 사람에서 때마침 2012년도에 처음으로 민간 독립 인권센터를 건립하는 일을 위해 모금 담당자를 채용하는 공고가 떴는데, ‘내가 모금을 할 수 있을까? 난 절대 못하는데, 이거 어떻게 모금을 해, 내가. 차라리 술을 사주고 밥을 사주는 건 가능해도, (웃음) 내가 사람들한테 설득을 해서 모금을?’… 그런데도 그 일이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메일 보내고 자기소개서 보내고 이렇게 해서 들어가게 됐어요. 

처음부터 모금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군요.

어유, 전혀 아니었어요. 그 일을 해봤던 적도 없고, 그냥 저한테 첫번째 업무로 주어진 게 후원인 관리, 그다음에는 모금이었죠. 저는 모금 경험이 일천하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간 거예요. 가서 이 후원인, 누가 뭐 이 인권센터 건립을 위해 만 원을 냈고 10만 원을 냈고 하는 엑셀 정리부터 시작해서,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연락을 드리고, 그다음에 모금을 위해서 어떤 행사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한테 돈이 필요하다고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초반에 하다 보니까요, 그냥 지금 저더러 ‘너 그동안에 뭐 했어.’ 하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모금을 했고, 또 모금을 위한 홍보와 지원을 하는 그런 활동을 했었던 거 같애.’ 약간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우와… 아, 너무나 많은 노하우와 또 깊은 경험치를 가지고 계시니까 막연히 체계적으로 훈련된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결국 상황을 진단하고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해오셨던 거네요. 초보 모금기획자에게 아주 용기가 됩니다…!

배워서 시작한 게 전혀 아니에요. 경험이 쌓여온 거고, 기초과정부터 심화 과정까지 배운 느낌이 아니고 그냥 부딪치면서 정리해보고 부딪치면서 정리해보고 뭐가 부족하다 그러면 어디 가서 교육 한번 듣고 와보고, 우리랑 굉장히 다르지만 이 부분은 배울 점이 있겠다고 짚어보고… 저는 인권 운동은 다른 시민사회 영역과 다르게 규모도 너무 작고 사람을 상대하는 곳이기도 하고, 스토리가 있는 운동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그 스토리가 때로는 사람들한테 감동을 주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를 얘기한다면, 모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막연하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우리의 당사자들이 대상화되지 않고,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청소년이 때로는 모금을 할 때 대상화되는 경우들이 많거든요. 이들이 너무 힘들어요, 돈이 필요해요, 이들이 집이 없어요, 이들은 차별받고 있어요, 이들은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래서 돈이 필요해요…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길을 찾는 게 되게 어려웠고 지금도 늘 어떤 경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돈이 필요하다고 얘기할까,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더 나은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모금은 계속 설득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떨 땐 되게 자신 없을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너무 많았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데에서 성공할 때도 있고, 그래서 저는 그냥 실패와 성공을 가지고 있는 그냥 경험자지, 내가 무언가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거고. 그래서 저는 주로 경험을 나누는 사람인 거죠. 경험을 나누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혹시나 대상화될까 봐 경계하면서 메세지를 만들어가고 있고요. 사람들을 설득해가는 이야기꾼으로 좀 남고 싶어요. 인권운동 안에서 누군가는 흘려버릴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잘 건져 올려서 돈을 모으고, 때로는 그 돈을 필요로 하는 곳에 배분해주는, 그런 사람. 

해주신 말씀 들어보면 한마디로 필요한 운동을 조직하고 판을 펼쳐온 기획자이자 조직가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활동을 시작하신 지 2년 만에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을 만드시고, 또 한 5년만에 감염인 사랑방도 만드신 거잖아요.

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이슈가 있고, 그런데 제가 그 이슈를 다 알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인권운동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젠가 그제도 난민 활동가들을 만나는 어떤 자리에 갔었는데, 내가 난민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거야. 하지만 ‘나는 배울 준비가 돼 있어, 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감수성이 있는 사람일 거야’, 하는 마음으로 의지를 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듣고 배우면서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보죠. 그런데 내가 그렇다고 해서 난민의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보고 이야기 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내가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죠. 혹은 난민 곁에 있는 활동가들의 삶을 좀 더 주목한다던가. 저는 이게 저의 역할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제 인생, 제 삶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뭐냐고 묻는다면, ‘네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이슈가 뭐야?’라고 저한테 물어본다면 저는 그냥 곧바로 얘기할 수 있어요. 하나는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고, 하나는 HIV 감염인 이슈라고요. 질병과 청소년들이 겪는 어떤 교육의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되겠다, 거기에 있어서는 내가 전문적인 사람이 돼야 되겠다, 거기에 있어서는 감수성을 틔운 사람이어야지, 하는 생각이 또렷하게 있어요.

내가 난민 활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서 내가 모르는 걸 때로는 솔직하게 말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난민 활동가로부터 배움을 얻잖아요. ‘만약 누군가 청소년 성소수자를 배우고 싶거나, HIV 감염인 인권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들에게 내가 나의 경험과 내가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이 두 영역이요, 소수자 영역 안에서도 너무 열악한 영역이었어. 그래서 띵동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그냥 놀 수 있고 상담할 수 있는, 그냥 그런 공간이 필요해서 만든 거예요. HIV 감염인 사랑방도, 감염인 분들이 모여서 그냥 동료들 만나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밥도 한 끼 하고 하는 그냥 그런 공간이 필요해서 모금을 했던 거였거든. 제가 뭘 잘해서 만들었고, 만들어질 수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메세지를 던졌을 때 사람들이 ‘그래, 저런 공간이 원래 필요했었지.’해서 공감해주신 분들이 보태서 띵동처럼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상담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감염인 분들이 같이 식사 나누고 상담하고 프로그램 할 수 있는 그런 PL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거 같애요. 그래서 그 경험이 저한테도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 됐고, 모금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고요. 또 그 공간이 운영하고 유지해나가기 여전히 어렵지만, 그 공간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되게 소중한 후원자들을 만나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조금 더 본인들의 관심들을 지속해 나가고, 우리가 서로서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 구축된다는 의미도 되게 있어서요. 다른 거는 난 잘 몰라. 다른 거는 잘 모르고, 정말 두 영역 안에서는 그래도 사람들한테 이게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돼야 되겠다, 라는 거고. 그다음에 재단 활동하면서는 ‘우리 활동가라는 존재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이 얼마나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고민을 하는 사람인지’를 내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해야 되겠다. 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늘 해요.

파랑도 부산지역 곳곳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곁이 되어주려고 만든 단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사실 저는 쉬운 과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와 같은 이런 고민을 하는 동료들이 부산에 생기는 거잖아요. 동료들이 생겨서 너무 기쁜 거죠. 

그리고 활동가들의 힘든 이야기들을 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세요? 

…?

내가 그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그 일을 내가 못 해줬을 때. 우리는 아직 돈도 없는데, 준비가 덜 됐는데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듣는 것만으로 끝났을 때. 미안하죠.

그쵸.

시간 내서 뭐 같이 밥도 먹고 술도 한 잔하고 그런 시간이 모두 소중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원하는 거를 우리 조직이 못 해줬을 때, 그게 너무 가슴 아플 때가 있거든요. (쓴웃음) 속상하고요. 나 스스로도 속상해. 그래서 기억을 늘 하고 있어요, 메모를 해두고. 언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이런 욕구를 느꼈고, 그가 이런 게 필요하다고 얘기했었지. 기록하고 기억해 내면서 소중한 기부처들을 만났을 때 꺼내서 연결하는 거죠. 우린 이런 게 필요한데 좀 가능하시면 기부를 해 주시면 어떨까요, 하고 용기 내서 또 얘기해 보고, 모금 캠페인을 기획할 때에도 한번 또 꺼내서 그 필요들을 담아서 한번 설계해보고, 그렇게 하고 있죠. 

네. 민석 파친님은 띵동과 감염인 사랑방 두 곳의 운영도 돌보고 있고, 또 사람의 상근자로서도 책임 실무자로서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계신 동시에 또 그 모든 일을 하는 활동가이자 조직가로서도 다방면에서 요청 받는대로 도우면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인권재단 사람에서 상근을 하고 있어서 안에서 활동비도 받고 하고 있고요. PL 사랑방이나 띵동에서 직책은 이제 뭐 대표로 있지만 급여를 받거나 그런 구조는 아니고, 재단일을 마치고 일을 보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주말에 좀 하거나 하는 식이에요. 매일 가진 못하고요. 일을 하는 데 조금 덜 어렵도록 동료 활동가들의 성장을 위해서 도움을 주거나 뭐 이렇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게, 뭐랄까요, 쓰리잡 이상인 것 같은데… 뭐 쓰리잡이라고 쳐도요. 쓰리잡인데 그 세 개가 다 활동가, 이런 느낌이거든요. (웃음) 이것들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음… 일단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으면요. 사실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힘든 순간들도 있고 기쁜 순간들도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좀 함께 견뎌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 같아요. 근데 잘 안 돼요. 저도 잘 안 되고, 내가 힘든 걸 사람들한테 잘 얘기를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사람들이 힘든 거는 최대한 들어주고 싶은 사람인 거예요. 되게 이상한 성격이죠. 

그르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요즘에는 저도 조금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되게 공감해 주는 거에 대해서 되게 위로받을 때가 많거든요. 근데 긴 시간 동안 그러지 못해 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게 되게 소진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근데 그게 조직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에 너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다른 누군가가 힘든 부분에 대해 내가 충분히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나도 내 힘듦을 말할 준비가 돼 있어야 된다는 것이요. 그게 동시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들을 하게 돼요. 말 못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쉽게 얘기 못하고 그것을 동료들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게 조직을 더 튼튼하게 하고 단단하게 해 나가는 되게 큰 힘이 되는 거 같애.

그리고 저는 욕심이 좀,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일에 욕심이 되게 과해요. (웃음) 세상을 바꾸는 거에 대해서는 별 큰 관심이 없나? (웃음) 조직이 안정되어야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어떤 기부, 모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화, 그리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활동들이 무엇인지 등등, 이런 것들을 듣고 조직의 계획에 반영시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더 시도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게 잘 되면은 상담도 더 잘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왜냐면 조직이 안정되고 공간이 안정되면 활동가들이 다른 걱정 안 하고 상담에 더 집중할 수 있잖아요. 다른 걱정 안 하고 청소년들과 더 프로그램 할 수 있고, 다른 걱정 안 하고 인권재단 사람 안에서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거고.

개인적으로 저는 조직을 강력하게 경험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출신지나 어떤 정체성 그룹에서도 잘 소속감을 느껴보지 못한 것도 있기도 하겠고, 또 어떤 큰 싸움에 조직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크게 가지고 나서보지도 못했고요. 그렇다보니 제가 지금 일하는 파랑도 그렇고, 조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생경하기도 하고 또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사실은 아직도 ‘조직’이라는 단어를 아주 가깝게 느끼지는 못하는 편인데, 오늘 대화 나누면서 듣는 민석 처장님 이야기 속에 담긴 ‘조직’은 굉장히 따듯하게 느껴지네요. 민석 파친님이 조직을 생각하는 시선이 따듯해서겠지요. 그럼 이제 저희 조직이랑도… 엮어서 한 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웃음) 민석 파친님은 어떻게 파랑의 친구가 되셨을까요. 우리가 언제 어떻게 만났죠?(웃음) 

처음에는 이제 파랑 준비할 때 연락이 왔어요. 정귀순 이사장님께서 인권재단 사람이 하는 역할을 부산에서도 만들어가고 싶다고요. 파랑을 시작하기 전에 ‘이주민과 함께’ 활동하셨을 때부터 서울에 일이 있으시면 재단에 한번 들러주시고 ‘부산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당연하죠. 부산에 있으면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거야.’ 막 이런 얘기들을 나눴었죠. 지금의 파랑이라는 이름이나 구체적인 구상이 있기 전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거든요. 정귀순 이사장님께서는 부산에서 긴 시간 동안 활동하시면서 이제는 이주민 영역을 넘어서서 부산의 다양한 인권활동들이 좀 더 성장하고 발전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들을 좀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거 같고, 그게 인연이 돼서 부산에서 활동가들 만나는 자리에 저를 그냥 초대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게 사비인지 공적 비용인지 모르겠는데, 내려오면 잠잘 데 걱정해 주시고, 술도 사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행사는 두세 시간이면 끝나지만 끝나는 자리에서도 부산 활동가들이랑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되는 모든 간담회에 초대를 해 주셔서, 그때 현지님도 만났고, 그 간담회 때부터 출발이 됐었던 것 같아요. 그게 파랑까지 이어지고 지금 현재까지도 계속 고맙게도 고민을 나누는 어떤 자리에 계속적으로 인권재단 사람을 초대해 주시는 거 같아요.

그전부터 그렇게 연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네, 여유가 많지 않아서 뚝딱거리고 툭툭 이렇게 끊어가면서 다음 질문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웃음) 민석 파친님의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요즘 고민은, 시간이 부족해요. (웃음) 나한테는 정말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어요. 바쁜 것도 있고, 힘든 것도 있는데… 저는 일이 재밌거든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재단이 요청받는 일들도 그렇고. 왜, 사람들이 신뢰받지 못하는 조직한테는 무언가를 요청하지 않잖아요. 신뢰하는 조직한테 더 많이 요구하게 되고, 부탁하게 되고, 이것도 해주세요, 저것도 해주세요, 그것도 필요해요, 하고 많이 요구하는 거니까요. 재단도 그런 요구를 많이 받는데, 사실 그게 저는 되게 기쁜 거예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신뢰하지 않는 조직은 만나고 싶지도 않죠. 그 조직 활동가들 안 만나죠, 피하죠. 하지만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한번 얘기해 주세요, 저것도 한번 얘기해 주세요, 그러면 그거를 전부 수용하지 못하는 저의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굉장히 기쁜 거예요, 그런 조직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게. 띵동도 그렇고, PL사랑방도 그렇고, 제가 일하는 인권재단 사람도 그렇고, 활동가들과 당사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게 굉장히 큰 힘이 돼요. 

이제 연말이 되어서 많이 하는 일이 기부처를 찾아다니고 발굴하는 거예요. 재단은 재단대로, 띵동은 띵동대로, PL사랑방은 PL사랑방대로. 사업계획서 쓰는 것도 되게 많고, 누구 만나러 가는 그런 일이 좀 많거든요, 연말이다 보니까. 그걸 조금이라도 더, 기회가 되면 더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시간이 부족해서 잘 안 돼요. (웃음) 그래서 빨리 이거를 11월, 12월 안에 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혹시나 내년도에 재정이 더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좀 되고 그래요. 시간이 더 있으면, 시간이 좀 나한테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요즘 막. (웃음) 병이야, 병. 

어떡해… 치료하면 안 되겠다…(웃음) 농담이고요. PL사랑방의 PL은 무슨 약자인가요? 사랑방 소개도 조금 더 부탁드려요.

피플 리빙 위드 에이치아이브이 / 에이즈 (People Living with HIV/AIDS) 라고 해서, HIV, AIDS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영어 표현의 줄임말인데, 단체는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 플러스라고 해요. 이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감염인들이 모이는 이 공간이 PL사랑방인 거죠. 

지금 있는 공간이 빌라 반지하의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 공간인데, 형님들이 이렇게 식사를 같이 나누고 하는 걸 되게 좋아하셔서 같이 모여서 뭘 많이 해 먹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모이는 공간이에요. 서울이 이제 월세도 되게 비싸고 이러다 보니까,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게 왜냐면,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시는 거죠. 사랑방은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뿐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시고 한 방에서는 놀고 계시고, 티비도 보고. 갈 곳이 없으니까 다 모이는 거예요. 거기가 일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그니까 더 넓은 데로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좀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도 너무 기쁜 일이에요. 거기 가면 좁은 방에 추석 연휴에 같이 식사 나누고 해요. 그럼 막 그때는 2,30명씩도 오세요. 그러면 방바닥에도 앉았다가 서서도 밥먹고, 복작복작해요. 그런데 사람이,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 공간에는 사람들 안 가잖아요, 지지받지 못하는데 왜 가요. 근데 이 공간이, 그런 공간, 나를 지지해주는 공간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거에 대해서도 사실 고마운 일이죠. 그 말인즉슨 잘 운영해가고 있다는 거고. 그렇게 당사자로부터 지지를 받는 공간이고, 그러니까 이 공간이 잘 운영될 수 있게끔 해야 하다보니까 돈이 필요해서 올해 모금을 했어요. 사실은 월세를 못 내는 상황까지도 갔었거든요. 그래도 한 달 정도 모금을 해서 당사자분들도 엄청 돈 내시고 지지해주시고 해서, 1200만 원 정도 모금이 됐어요. 그러니까 한 몇 년 또 버틸 수 있는 돈이 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모금이 되면 이제 고맙죠. 2,3년 안에 조금 더 넓은 공간, 안정되고 편안하게 오실 수 있는, 그리고 또 쾌적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보는 게 좀 목표가 됐습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필요를 잘 길어올려서 메세지를 전하고, 그에 대한 공감의 힘을 모아 조직을 도우면서 재미를 느낀다… 파친님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낌없이 퍼주는 조직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인권운동이 성장하는 지점에서 살 맛을 느낀다는 점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힘으로 이 일들을 다 해내신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다음으로는 (웃음) 민석 파친님에게 인권이란? 하는 질문입니다. 인권은 뭐다, 이렇게 이야기해주셔도 좋고, 생각하신 바를 편안하게 이야기해주셔도 좋습니다!

나는 이 질문이 제일 어려워. 음… 내 곁에, 나를 포함해, 내 곁에 있는 사람과… 잘 살기 위해, 나를 포함해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잘 살기 위해, 변화들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 같애,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나도 잘 살아야 되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고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걸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응. 그게 나한테 또 굉장히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고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면 힘들어요, 저는, 아직도. 그리고 되게 회피해요. 되게 회피형 인간이에요. 근데 그럴 때면 마음 한 켠에서 좀 기억하려고 노력해요, 잊지 않아야 되는, 응, 잊지 않아야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역할을 제가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에게 인권은 거창하고 이런 것보다는, 내 곁에 있는 사람과 작은 희망을 만들어내는 그냥 그런 움직임, 그냥 함께 웃을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것을 계속 쌓아나가는 것 같아요. 쌓아나가고 쌓아나고 또 쌓아나가는 것.

 네, 감사합니다. 나를 포함해서… 내 곁에 있는… 

나를 포함해서! 꼭 나를 포함해 주세요~ (웃음) 

(웃음) 알겠습니다. 사람들과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민석 파친님께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냥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하루가, 그 하루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맞다.

그러면 잘 살고 있는 거란 생각도 들구요. 잘 나누고 싶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잘 나누고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누군가로부터 채우고 바꿔가고 싶기도 하고, 그게 잘 사는 거 아닐까? 근데 나의 단점을 다른 사람들의 장점으로부터 바꿔나가는데,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는 단점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거잖아. 근데 나한테 지적해주고 이걸 바꿔야 된다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면. 전 어렸을 때 그거 너무 싫었거든요? 지적받고, 나는 완벽해야 되고 그런, 되게 윤리적인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느슨해졌어요. 누가 나한테 지적해주는 게 화가 잘 안 나. (웃음) 어쩔 때는, 야 진짜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응, 그것이 상호 ‘잘’이 아닐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거를 누군가와 나누고, 누군가로부터 내가 바꿔나갈 지점들을 충분히 그 충고와 조언들을 들으면서, 정민석, 정욜이란 사람이 인권운동 안에서, 인권활동가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계속 쓰임이 있는 어떤 역할을 계속 요구받고, 그 위치에 있다는 건 진짜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활동가’로서 잘 살고 있다는 거는 그때 많이 느껴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단점도 있으시군요. (웃음)

어우, 단점 너무 많죠. (웃음) 사고도 많이 쳤어요. 살아오면서 사람에 대한 사고도 많이 쳤고.

파친님이 해주신 말씀들이 너무 주옥 같아서 사람들이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벌써 마지막 질문입니다! 파친님은 파랑과 어떤 친구사이가 되고 싶으신가요?
조금 오글거리는 질문이지만 파친님의 파랑에 대한 애정 고백을 강압적으로 듣고야 말겠다, 하는 엔딩 질문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웃음)

저는 파랑과 오늘보다 내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 내가 더 오글거리기. (웃음) 저는 제가 파랑에 그동안 쓰임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너무 좋고요. 앞으로도 더 쓰임이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활동가로서 얘기하자면 인권재단 사람의 정말 좋은 친구고, 정욜, 정민석의 정말 좋은 친구예요. 파랑을 통해서 배울 때도 많고요. 지역에서 새로운 단체를, 그것도 지원 조직으로 만들어서 움직인다는 게 굉장히 어려우실 거고, 힘드실 거고, 재원을 끌어와야 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너무 감사해요.

파랑이 다른 지역의 좋은 모델이 돼서, 파랑이 필요로 할 때 서울에서 제가 내려와서 재단의 경험을 나눠줬던 것처럼, 이제는 재단을 찾는 게 아니라 광주에서, 혹은 대구에서, 다른 지역에서 파랑Ⅱ, 파랑Ⅲ를 만들려고 할 때, 파랑의 경험이 정말 많은 지역 안에서 공유되고 설명되어지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람에서 저희가 썼던 기획서조차도 막 다 나누잖아요. 앞으로는 파랑의 기획서도. 그러니까 기록 잘 해주세요, 분명히 요구 받게 되실 거예요. 파랑의 경험을 기획단계의 기획서부터 그 결과까지 하나하나 기록해두면 이제는 파랑을 찾을 거예요, 사람들이.

저희가 지금 아직은 아카이빙이 좀 약한데 그 부분도 필요하겠네요. 

막 뭐라도, 이렇게, 어디라도 넣어놔, 그냥 폴더에. (웃음) 일단 버리지 말고 넣어놓으면 작은 기획서 하나도 파랑도 저번에 재단에, 왜 그 작은 기획서 하나도,

맞아요. 너무 소중하게 쓰여요.

그니까, 그 아무것도 없을 때 그 막연함, 막연함이 너무 있잖아요. 근데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할 필요 없거든요. 맨땅에 헤딩한 사람들 거 가져다 쓰면 되죠. 모방이 최선의 창조야. 이거를 가지고 가서 부산에 가장 어울리는 문서를 만드는 거잖아요. 나중에는 또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활동가들한테 파랑의 자료가 공공재가 돼서 정말 또 다른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현장을 지원하는 지원 조직들이 더 많이 만들어져야 되고, 그들이 현장과 같이 호흡할 때 현장 활동가들은 정말 큰 용기와 위로를 받고 정말 가까운 친구로서 곁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이 모든 기부금 다 못 모아요. 이거는 앞으로 계속 그럴 거예요. 그리고 시나 도의 지원을 받고 운영되는 운영지원조직들도 못 해요, 그거. 그러니까 파랑하고 인권재단 사람은 정말 특별한 모델이고, 특히 지역에서 파랑의 모델은 앞으로는 더 많이 확산되어져야되는 모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카이빙을 잘 해 놓읍시다! 좋습니다!그리고 더 많은 지역에 이 모델이 만들어지려고 할 때 저희의 자료가 정말 필요로 하는 곳에 잘 활용되고 경험을 나눠주기 위해서는, 더 많이 애써 돌아다니고, 애써 많은 우리의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파랑의 지속가능성 활동에 인권재단 사람이, 또 제가, 앞으로 더 많은 아이디어도 같이 많이 나눴으면 좋겠고. 그랬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사실 모금사업 설계 자료 보내주실 때 그런 하나하나에서도 이런 태도들을 좀 많이 배우는 거예요. 그냥 심지어 재단 사례 자료를 디테일하게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사려깊고 감사한데, 이제 팀장님께서 재단 사례만 보내주시는 게 아니라 참고할 만한 다른 곳들 사례까지 다 포괄해서 저희한테 그곳들 사례에서 살펴봐야 할 포인트까지 짚어가면서 보내주셨거든요.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다 싶기도 하고.


소통의 방법을 되게 신경을 많이 써요, 인권재단 사람이. 그냥 업무로 관계를 맺는 거에도 불구하고. 근데 때로는 되게 엄격해요. 지원 조직이니까 마냥 괜찮다고 덮는 것도 절대 없고요. 조직이 성장할 수 있게끔 인권재단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밤이고 낮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뭐든지, 캠페인, 기획, 항상 곁에서 할 수 있는 형태로 곁에 있을게, 언제든 우리가 동료로서 있을게, 라는 신호를 줘요. 하지만 부족한 건 부족한 거야, 잘못된 건 잘못된 거야, 이것도 숨기지 않고 얘기해줘요.

고맙습니다.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한보따리지만,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 더 가까워질 친구니까! 차차 풀어가기로 해요!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이야기 잘 풀어내주셔서 감사해요! 부산에서 마저 좋은 시간 보내시고, 서울에도 조심히 올라가셔요!

파친코 인터뷰 재미있게 보셨나요?

이번에는 인권재단 사람의 정민석 파친님을 만나봤는데요.

 

다음 파친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한 손에는 법전을 다른 손은 인권운동을 향해 뻗어있는 그 분, 그 분을 만납니다.

그럼 다음 파라솔에서 파친코 8화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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