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파친코 8화 / 송시섭

언론·기고

[파친코] 한 손에는 법전을📖, 다른 손에는 인권운동을💪! 송시섭 파친님

이번 달에는 파랑의 이사님이시자 다양한 인권단체 및 인권행정 관련 자문을 맡아주고 계시는 송시섭 파친님을 만났습니다!
🙌 시섭 파친님은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사법을 가르치고 계시기도 하는데요.
인권법과 교육이라는 분야를 탐구하는 대화도 무척 흥미롭고 즐거웠답니다. 분량상 모두 싣지는 못했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파친코 인터뷰는 이렇게 진행할 거고요. 나중에 저한테 사진을 몇 장 보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파랑에도 제가 나온 사진이 조금 있지 않나요? 아니면 인권센터나 진경선생님한테도 있을 거예요.

네, 그럼 그쪽으로는 제가 취합해보고요. 강의하실 때 사진이나 일상적인 모습 사진을 한 장 정도씩만 챙겨주실 수 있으면 좋고요.

그런 게 있으려나요. 보통 제가 집에서도 사진을 찍어주는 편이라서.

가족들이 좋겠네요.

(웃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그러면 사진은 한 번 찾아봐주시는 것으로 부탁을 드리고요. 한 번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사전 질문지를 보내드렸는데, 문항마다 미리 짧게 응답을 적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이걸 보고 제가 조금 더 자세하게 여쭤볼게요. 편하게 이야기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계시고, 로스쿨 이전에는 10여년간 변호사로 활동하셨다고 알려주셨는데, 직업 외에도 하시고 계신 활동과 지향을 담아 좀 더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기 소개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면 답을 하는 형태로 해보면 어떨까요?

음…

궁금하신 거 다 물어보시면

음, 네, 그러면 파친님은… 파친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웃음) 음… 그러면 현지쌤은, 현지쌤이 일반적으로 이제 저를 볼 때. 어떤 느낌이세요?

…? …! …?

그러니까 이미지, 그러니까 평소에 이렇게 이런저런 활동을 하거나, 네, 회의를 하거나 이렇게 해서 했을 때 저의 모습.

저요? (웃음)

지금 질문하러 왔는데 갑자기 질문을 받아버려가지고 (웃음)

깜짝 놀라버렸지만 (웃음) 음, 제 마음대로,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려보자면요….(웃음) 파친님은 일단 권위주의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시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계시고 어찌보면 권위주의적으로 굴기 좋은 여건을 확보하셨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잖아요. 파친님은 항상 고저 없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귀기울여 듣는다는 인상을 저는 받았던 것 같아요. 파친님이 소탈하게 웃으실 때 그런 느낌이 들었나?

인권아카데미 인권삼행시 백일장에서 아주 정중하게 부상을 건네시는 송시섭 파친님. (누가 보면 받는 줄 알겠어요!)

그리고 되게 바쁘실 텐데, 어쨌든 저는 파랑이라는 소속을 가지고 만나는 거니까 파랑은 파친님 같은 분들의 협력과 응원이 많이 필요하고, 그 반대로 저희가 뭘 해드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닌데, 늘 애써주시고 물심양면으로 항상 함께해 주셔서 반갑고 감사하죠. 물론 파랑의 이사님이시지만, 진짜로 ‘진짜 이사님’ 같아요. (웃음) 그리고 제가 어떻다, 저떻다, 하는 게 참 민망하지만, 솔직히 좋은 어른이시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저런 어른이 되어왔을까, 속으로 궁금했고요.

(웃음) 제가 그렇게 비춰졌군요. 왜 그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저의 가장 바탕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아버지, 어머님 두 분 모두 기독교 신자셨고, 저도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래도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막 무언가를 성취하라거나 많이 얻으라는 것보다는 좀 나누고 살라고 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저도 그런 걸 들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조금이라도 무언가 가진 게 있으면 나눠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삼형제 중에 막내예요, 제가. 아들만 셋인 집의 막내다 보니까 사랑을 많이 받고 그러다 보니까, 제 생각에도 좀 이기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사람 다 그렇겠지만 부모님이 아무래도 형들은 양보를 시키고 막내인 저는 좀 더 챙겨주고 그러셨을 거 아니에요. 물론 장남이라고 큰 형을 챙겨준 부분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그러다 보니까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어릴 때 느꼈던 게 아닐까, 그게 제 속에는 약간 이기적인 마음,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도 같아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고, 또 저는 저대로 막내다 보니까 이기적인 습성이 많이 생기고, 그 두 마음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하고, 진로를 선택하거나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도 그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 것 같고요.

그래도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이렇게 남아 있었던 그런 마음들이 좀 깨어졌다고 한다면 그건 인권운동의 덕분이기도 해요. 제가 인권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 건, 장애인 인권 운동과의 인연이 시작이었는데요. 같은 법조계에 있는 후배 한 분이 그 당시에 판사님이셨는데, 그분이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시면서 저보고 모임에 한번 참여해 보라고 권하셨고, 그 후배로 인해서 장애인 인권 운동을 처음 만났죠. 그때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막 만들어지는 단계였는데, 그 과정에 같이 참여하면서 제가 오랫동안 가졌던 개인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좀 많이 깨졌던 것 같아요.같이 공부를 하면서 편견도 많이 없어지고, 제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는지도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흔히 말하는 이제 사회의 약자 소수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좀 깨지게 되었고요. 현지씨가 저를 볼 때 좀 좋은 모습들이 있다고 하시면, 아마 저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해온 게 아닌가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진짜 좀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런데 그나마 기독교적인 영향과 장애인 인권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래도 이기적인 모습이 좀 많이 순화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셨군요. 그게 언제인지 기억나세요?

그게 이제 기독교적으로는 대학시절이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만난 건 대학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을 적에죠. 그래서 제 인생에 좀 중요한 포인트는 터닝 포인트는 대학교 1학년과 변호사 초기 시절이죠.

저는 파친님을 파랑에서 처음 만났다보니 전사를 잘 모르는데, 변호사로 활동을 오래 하셨나보아요.

96년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97,8년도 무렵에 서울 로펌에서 일을 했고요. 그리고 저는 결혼을 좀 늦게 했어요. 서른 다섯 무렵에 했는데, 결혼할 때 아내 직장이 포항이었어요. 포항 한동대의 교수로 있었는데, 결혼 초기에는 집을 서울에 두고 평일에는 각자 일을 하다 주말이면 아내가 포항에서 올라오곤 했죠. 그러다가 이제 아기가 태어났는데, 남자 쌍둥이가 태어났어요.그래서 2001년에 이제 남자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고민이 생긴 거예요. 저도 출근해야 되고 아내는 이제 주중에 포항에 있으니까. 애를 어떻게 키워야 되는가… 고민을 하다 일단은 부산 송도에 있는 처갓집에 아이들을 부탁하고, 주말이면 우리 두 사람이 그 집으로 모이는 거죠. 만나서 아기를 보고, 월요일 아침 첫 비행기로 저는 서울로 가고, 아내는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포항으로 올라가고, 그렇게 살았던 거죠. 몇 달을 그렇게 하니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는 선배님이 계시는 법률사무실이 있어서 거기로 옮기면서 부산으로 먼저 내려왔고, 아내도 그로부터 조금 뒤에 이제 학교를 동서대로 옮겨서 부산으로 왔죠.

우와, 동서대요? 혹시 어느 과에 계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중국어요. 중국 문학을 전공해서 중국에서 공부하고 그랬던 사람이에요.

아, 제가 뵐 일은 없었겠어요. (웃음)

(웃음) 이렇게 해서 가족이 부산에서 다 만나게 된 거예요. 그렇게 부산에서 결혼 생활을 쭉 하고 있는데, 제가 있던 법률 사무실에는 한 5,6년 이렇게 다니면 일종의 안식년 같은 개념으로 원하면 미국 유학도 가고, 그런 제도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집사람하고 좀 협의를 해서 미국으로 1년간 공부를 하러 갔었죠. 거기서 로스쿨 다니고 한국 돌아오려고 할 그때 막 한국에서도 로스쿨 제도가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동아대에 계시는 선배님이 저한테 연락을 주셔서, 로스쿨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장실무를 경험한 실무가가 교수로 오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조건이 박사학위까지는 필요 없고, 석사학위 정도 있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변호사 자격과 석사학위 정도 있으면 대학에 올 수 있다. 근데 아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한 1년 정도 미국 유학을 하면서, 석사학위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격이 대충 맞는 거죠. 그전에도 사실은 학교에 대한 생각이 조금 있긴 있었어요, 일을 하는 데 바빠서 그렇게 크게 생각은 못해봤었지만요. 또 학교에 들어가려면 석사, 박사,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런 여유까지는 없어서 크게 생각을 안 했었는데, 그런 제안을 받게 되고 로스쿨은 또 실무가 위주로 뽑는다고 하니, ‘그러면 한번 도전해볼까.’하고 지원해서 교수가 된 거죠. 그때가 2007년도였어요.

학교에도 엄청 오래 계셨네요. 이제 15주년이에요!

해가 바뀌어서 17년차!96년에서 2007년까지, 10년을 넘게, 거의 12년을 변호사로 살았고, 다시 대학에 와서 한 15년 정도가 지나가고 있고, 그래서 좀 대학 생활이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다시 한 번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처음에는 변호사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대학 교수로 살았는데, 이제 혹시 퇴직을 한다거나 또는 정년이 된다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될 텐데 제3의 인생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그런 것도 생각해 보고 있어요.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있겠고요. 만약 지금까지 살면서 터득한 것들을 좀 이어간다고 한다면, 새로운 법조인 인권운동조직 모델에 대한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같은 변호사를 하더라도 사건 위주의 변호사보다는 좀 더 공익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변호사 사무실이 되는 거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보고 계시네요. 제 3의 인생의 시작을 멀리 보지 않고 계신 것처럼 느껴져요.

65세가 대학 교수의 정년인데, 제가 올해로 58세니까 많이 남은 건 아니죠.

정말요? 왜 이렇게 젊어 보이세요. 삐빅, 사기죄입니다.

(웃음) 만으로 57, 58 정도 되니까 정년까지 채운다면 7,8년 정도 더 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한 60대 초반쯤, 그러니까 대학으로 옮긴지 한 20년 정도를 채우게 되면 명예퇴직을 해서 아까 말한 제3의 인생을 한 번 살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치면 한 4,5년 뒤니까, 그러려면 지금부터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하고 준비도 해야 되니까 이런저런 꿈을 꾸고 있죠.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왠지 파친님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기분으로! 저도 파친님의 제3의 인생을 응원드려요. 장차법 만들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런 공익 활동에 관계를 맺어오셨던 건가요?

그렇죠. 법제정활동에 참여한 변호사님들이 더 많이 계셨는데, 저는 어쩌다보니 계속 연을 이어 지내오고 있는 것 같아요. 법제정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단체가 지금 이름으로는 열린넷인데, 그 단체가 부산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구호 플랜카드를 들고 법제정 촉구 전국순례도 하고 그랬거든요. 뇌병변 장애인 활동가들이 직접 나서서요.그랬군요.그 단체를 통해서 사실은 장차법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어찌 보면 서울에 있을 때는 후배 판사를 통해서 만나게 된 분들께 기술적인 부분을 조금 도와드린 경험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부산에 내려온 이후에 그분들을 다시 만나서 이제는 거의 식구가 된 거죠. 필요할 때 법률적으로 도와드린다고 해도 법이 만들어졌으니까 굳이 더 이상 법제정 때만큼 활동할 일은 없잖아요. 근데 저 같은 경우에는 부산에 내려오면서 그 이후로도 모임에 계속 나가고 하면서 한 식구가 된 거예요. 지금도 열린넷의 이사로 있고요. 열린 네트워크를 통해서 십수년 동안 같이 행사도 열고 인권운동 하고 그러면서 어려운 시간과 기쁜 시간들을 함께 통화하면서 한 식구처럼 살았던 거죠. 변호사나 법률가로서가 아니고 그냥 편한 식구 말이에요. 장애인들의 세계, 장애인인권운동 말로는 장판이라고 하는, 그 세계가 그냥 저의 삶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냥 한 번씩 가서 돕는다, 또는 행사에 기여한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으로 회의가 있고, 식사가 있고, 모임이 있는, 가족처럼요.

파친님의 삶의 일부분, 아주 중요한 관계망 중 하나가 되었군요.

그래서 일이 있으면 같이 만나 식사하고, 또 축하할 일 있으면 축하도 하고, 또 경조사가 있으면 또 찾아가기도 하고, 이렇게 이제 서로 교류하다 보니 그 모임이 이제 저에게서는 삶의 일부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저도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하던 저의 편견, 은연중에 자리잡아있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 장애인의 삶 자체에 대한 편견들이 자연스럽게 다 해소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말을 하거나 생각하는 게 저도 모르게 점점 바뀌어 간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 사회의 제도와 시스템이 참 불합리하게 되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더라고요. 제가 지금은 비장애인이지만 장애인 당사자의 어떤 그런 마음을 느끼다 보니 사회가 너무 많이 닫혀 있고 차별이 만연하다는 걸 알 수 밖에 없게 된 거죠. 또 미국 가서 조금 더 오픈된 사회를 보니까 더 비교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면 그렇게 장애인 단체와 함께 활동하신지, 그리고 장애인 인권 활동과 네트워크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신 지도 이미 한 25년 차가 되셨네요. 이기적인 삶을 살아오셨다고 하기에는 (웃음) 굉장히 오랫동안 공익활동을 해오신 것 같은데, 그럼 부산에서도 계속 공익 활동을 하셨나요.

사실 변호사로서 하는 법률 활동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공익적인 일을 많이 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다만 이제 서울에서 공익 인권단체들이 만들어지고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같은 법률지원조직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되게 부러워하기도 했죠. 그런 게 부산에도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데 제가 직접 만들 용기도 조금 없었던 것 같고, 또 그 당시에는 뜻이 맞는 분들을 만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학교생활이 시작되었고요. 그런데 그 이후에 보니까 이제 우리 젊은 이현우 변호사님 같은 분들도 부산으로 오시고, 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중심으로 새로운 분들이 계셔서 되게 기대가 됐고, 또 제가 젊을 때 못 했지만 그분들이 하시는 거 보니까 되게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아까 말한 그 제3의 인생 경로 중에 하나로 그려보는 게, 그런 공익법률조직을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거죠.

와, 너무 기대돼요. 제3의 인생. 남의 제3의 인생이 이렇게 기대될 수가.

(웃음) 한번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아까 궁금했던 게, 인생에서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장애인 인권운동 함께 하게 된 일이라고 하셨고요,
첫 번째는 대학시절이라고 아까 잠깐 이야기를 해주셨었는데, 20대 초반의 파친님을 흔들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요.

대학교 다닐 때는 아까 말한 것처럼 종교적인 체험이죠.회심.그렇죠. 장애인 단체와의 만남이 사회적인 회심이라면, 종교적인 회심의 기회가 대학교 1학년 때 있었어요. 종교적으로 믿었던 부분들을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죠. 그때 신앙에 대한 확신을 좀 가지게 되었고요. 그 이전에는 부모님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대로 형성된 세계관이라면 대학교 1학년 때는 저의 신앙이 분명히 생기게 된 거죠. 대학에 들어가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84학번인데 80년대는 격변기의 사회였기 때문에, 저도 흔히 말하는 ‘무엇이 진리인가’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진짜 이런 책, 저런 책 많이 읽고, 이런 단체, 저런 단체, 종교단체도 포함해서 다른 종교들도 많이 좀 기웃거리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영성체험을 하면서 이제 정착이 된 거죠.

 

그러셨군요. 개인적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저는 저는 기독교 생활을 꽤 오래 했는데.

네, 지금도 교회 다니시고요?

아니요, 지금은. 왜냐하면 저는 오랫동안 종교 생활을 했는데 신앙이 생기지 않아서 되게 아쉬운 마음으로 더 다니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다닐 적에는 늘 신이 정말 있다면 저에게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했었는데 저에게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천국가는 책에 제 이름이 없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음) 저는 이미 지옥행이구나 하고… (웃음) 그치만 여전히 ‘희년’과 사회주의 이야기, 히브리서 11장 1절과 이미와 아직 사이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좋아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그림과 시처럼 좋아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뭐 오늘 인터뷰가 신앙 인터뷰는 아니지만(웃음), 제가 종교적인 그런 체험을 하면서 느꼈던 게 뭐냐면요. 감사하게도, 제가 더 좁아지고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면, 신앙 체험을 하면서, 그런 신비스러운 체험이 저로 하여금 ‘내가 갖고 있는 신앙만이 진리야.’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는 더 넓은 어떤 세계가 있다는 걸 봤어요. 진리는 누군가 독점하거나 기독교가 전매특허 내두고 ‘나는 진리고 너희들은 다, 아까 현지쌤 말씀하신 것처럼, 지옥 간다.(웃음)’ 이렇게 배운 게 아니고, 제가 체험한 건 오히려 진리가 더 넓고, 더 자유롭고, 그 누구와도 통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 이후에 제가, 신앙은 기독교로 정착을 했지만, 그 이후로 오히려 더 많은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도 종교적인 그런 장벽들은 상대적으로 좀 낮은 편이죠. 그래서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러시군요. 제가 받아들였던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분히 배타적인 집단이었어서요, 제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들 하는 교단에서 강한 교육을 받았던 까닭이 크겠지만요. 이후에 에큐메니컬 운동이나 성공회 같은 곳에 관심을 가진 적도 있고 가나안 성도로 사는 길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지만, 기독교적 신앙심이 전혀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도 안 나가다보니 결국 종교심조차 지키기 힘들더라고요. 그렇다보니 파친님의 종교적 회심과 사회적 회심 이야기가 청해 들을 수 있어 더욱 의미있고 흥미로웠어요. 진솔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파친님의 활동 중에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무래도 학교 생활일 것 같은데요. 좀 더 이야기 들려주셔도 좋겠습니다. 교수 활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든가 법률 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겪게 되는 경험이나 생각들도 궁금해요.

교수로서의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새로운 걸 깨닫고 배워가는 모습, 또 그걸 통해 변해가는 모습이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저에겐 정말 천직 중에 하나에요. 가르치는 게 너무 즐겁고, 그리고 잘 가르치기 위해서 고민도 많이 하고요. 지금도 그래서 학생들에게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걸 잘 받아들여줄 때 되게 보람도 크고요. 그래서 제 활동시간의 최소 절반, 혹은 3분의 2 정도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쓰는 것 같고, 많은 시간을 쓰는만큼이나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교수는 정말 제 천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가르치는 일 외에도 학교 안에 있는 법률상담센터의 소장으로도 일을 하고 있거든요. 주민분들이 찾아오시면 자문도 해드리고 로스쿨 안에 있는 기독교 모임의 지도 교수도 하고 있고요.학교 생활만으로도 엄청 바쁘시겠는데요.
네, 정말 학교 일로 제 시간의 3분의 2까지도 쓰는 것 같고요.

나머지 3분의 1 정도는 개인적으로 등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도 좀 쓰고, 그중에 또 일부는 인권단체 회의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지금 이렇게요. 파랑 같이 이제 막 시작해서 초기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단체들을 보면, 제가 능력은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함께하고 싶어요. 방법과 형식을 떠나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돕고 고민도 함께 나누고요. 다른 많은 중요한 일들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뜻을 가진 단체, 특히 인권단체가 출범을 하고 잘 성장해가는 과정에 부족한 능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외부 활동들을 하죠. 예를 들면 검찰청에 무슨 무슨 위원회라든지, 제가 이제 형사법을 가르치다 보니까 공공기관에 설치된 인권경영위원회에도 나가고요. 요즘 인권 경영이 많이 강화돼서 기업 내 인권 때문에 인권경영위원회에 갈 일이 좀 더 생겼어요. 기관들 내부 인사위원회나 울산지방노동위원회 같은 지방노동위원회에 참여해서 자문도 하고요. 제가 노동법 전문가는 아닌데 인권 관련으로 노동위원회 활동도 같이 하고요. 중앙에서 하는 활동으로는 법제처의 법령해석심의위원회라는, 이름이 좀 어려운데, 그러니까 각 국가기관 간에 이제 다툼이 생기거나 국민들이 이런 법령은 어떻게 해석해야 정확한지에 대해서나 심의요청이 들어오면 그걸 전국에 있는 위원들이 모여서 같이 협의를 하는 심의기구고, 그 위원회 활동도 하고 있죠.

와아, 시간이 늘 모자라실 것 같아요. 너무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지난 달에 연락 주셨을 때도 제가 1월로 부탁을 드렸던 게, 학기 중에는 좀 일정이 빡빡하고 방학이 되면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어서요. 오늘 날을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새해 첫 뉴스레터를 파친님과 함께 여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어서요. 저도 무척 좋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변호사가 된 파친님 제자분들 중에 공익 변호 활동을 하고 계신 분도 있을까요?

일단 몇몇 변호사들이 공익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얼마 전에 보니까 조애진 변호사님도 동아대 로스쿨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동아대 출신 변호사님들이 사회에 나와서 공익활동도 많이 하시고 또 지금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금속노조 법률원 같은, 노조가 설립한 법률원에 가서 활동하는 제자들도 계시더라고요.지난번에 파랑에서 잠시 있었던 우리 양안나 변호사 같은 분도 이제 막 변호사가 되셔서 아직은 공익활동을 전면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공익활동에 대한 마음을 갖고 계시고, 그런 분들이 사회로 계속 나가고 있으니 기대되고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물론 판검사 되는 제자들도 훌륭하고 좋지만, 공익적인 영역에 나가서 열심히 뛰고 헌신하고 노력하시는 졸업생들을 보면 되게 자랑스럽죠.

정말 기쁘겠어요. 안나선생님, 보고 싶네요.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변호사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 보람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법을 전혀 모르는 분들이 들어와서 3년 과정에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고 또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공익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되게 보람이 있죠.제가 맡은 과목에 법조 윤리도 있어요. 제가 주로는 형사법 과목을 가르치지만 법조윤리도 가르치고 있어요. 그 법조윤리 과목 중에 한 파트가 공익 활동이에요. 그래서 변호사가 되면 꼭 공익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시도록 지도하죠. 그리고 그 이전에 법적으로도 정해져 있는 공익 활동 시간이 있어요.그래요? 처음 알았어요.예를 들면 뭐 다양한 시민단체에 가서 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 국선 변호사 이런 거 들어보셨잖아요. 국선 변호사 활동도 어찌 보면 공익 활동의 일환이거든요. 국선만 전담하는 변호사도 있고. 또 자기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사건별로 국선 활동을 하기도 해요. 그렇게 국선활동을 하기도 하고, 사회단체에 가서 비영리 활동을 하는 분도 계시고. 법에 정해져 있어요. 몇 시간 해야 한다고.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라 너무 신기해요. 조금만 더 여쭤보자면, 그 변호사가 공익활동을 요구한 시간만큼 충분히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어디 보고하고 인정받고 그런 시스템이 있나요?

(웃음) 그렇죠. 학생들이 봉사활동하고 확인증을 받고, 봉사시간 인정받아 가듯이 변호사도 어떤 단체에서 활동한 시간, 또는 어떤 강의를 듣는 시간 같은 걸 채워요. 이를테면 법조 윤리와 관련된 특강을 듣는다거나 하는 시간도 공익 활동 시간에 포함시켜주기도 하거든요. 또 어느 단체에 가서 이제 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공익 활동으로 인정을 해주고요. 그러면 그걸 인정받으려면 그 기관에 회의에 참석했다. 또는 그 특강을 들었다. 또는 국선 변호를 했다. 이걸 확인을 받아야 되는 거죠, 그래야 인정이 되니까.

그렇군요. 이 자체가 변호사라는 직업이 다분히 공익적인 목적, 그런 소명이 있는 직업이라는 걸 말해주네요.

사실 따지고 보면요, 이건 이번 인터뷰하고 관계없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영국에서 변호사라고 하는 직업은, 제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냥 책에서 들은 바로는, 원래 처음 출발은 돈을 안 받았대요, 영국에서는. 안 받은 이유가 뭐냐면, 대부분의 법조인들, 변호사들이 이미 귀족인 거예요. 재산도 많고 물려받은 지위도 높은 사람들.

변호활동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일환이었던 거군요.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변호를 한다는 거는 영업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냥 공적인 서비스로서 제공해야 한다, 내가 가진 게 이미 워낙 많으니까. 그래서 내가 훈련받고 법조인 됐는데, 따라서 의뢰인들로부터 돈을 받으면 안 된다. 이렇게 시작을 했대요, 지금은 안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원래는 이제 변호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공익의 수호자, 공익의 대변자가 더 훨씬 더 강했던 거죠. 근데 이제 사회가 점점 바뀌면서 이제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냥 하나의 일반적인 직업처럼 되면서 영리, 장사를 해야 되는, 손님을 모셔와야 되고, 수임료를 받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는, 어떤 그런 직업으로 이제 변해온 거죠.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이제 지금의 직업관에서는 아무래도 돈 많이 버는 직업, 잘사는 직업, 그 직업을 가지면 부자가 된다는, 그런 걸로 생각하다 보니까, 법에서 공익 활동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또 로스쿨에서도 법조 윤리라는 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해서 ‘여러분들이 법조인이 되려면 이런 기본적인 윤리를 갖춰야 되고, 그중에서도 특히 공익 활동을 중요시해야 된다.’ 이렇게 교육을 하고 있는 거죠.

파친님의 법조 윤리 과목을 미래 법조인들이 잘 들어서 마음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네요. 사실… 되게 명백한 가해자들을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쵸. 그런 고민들이 이제 법조윤리에서도 중요한 주제거든요. 예를 들면 이 사람이 살인자라는 걸 알고도 변호할 수 있을까? 또는, 수임료도 낼 수도 없는 형편의 정말 가난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과연 그 사건을 거절할 수 있는가. 돈을 못 내니까 내가 이 사건을 맡아봤자 수입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과연 거절할 수 있는가. 이런 주제들을 법조윤리 안에서 다루고 있어요. 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고요.

만약에 제가 질문을 바꿔서, 현지 선생님이 변호사인데 상담을 하다 보니까 이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러면 그때 과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계속 변호를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사임을 해야 될 것인가. 나 말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 그만둔다 하더라도 다른 국선 변호사가 또 도와주겠지만, 나보다 더 이 사건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의뢰인은 이제 나를 100% 신뢰하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고민들도 나오고. 또 이제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서 과연 위증을 해달라고, 예를 들면 가족 중에 한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좀 유리하게 이야기해달라, 그렇게 요청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도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예요.굉장히 윤리적인 고민들이 많아요. 아마 그건 제가 볼 때 의료 윤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의사 선생님들도. 정말 한 푼도 돈을 낼 수 없는 환자가 찾아왔을 때, 과연 이 치료를 해야 될 건가, 내쳐야 될 건가, 이런 것도 고민이 있겠죠. 그러니까 장사, 비즈니스로서의 변호사와, 공익의 대변자로서 윤리성을 갖추기를 엄격하게 요구받는 변호사, 그 두가지 이미지가 늘 존재하고 있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쪽만 너무 강조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이쪽만 강조하는데, 제가 볼 때 너무 극단적인 건 현실적으로 좀 어렵고, 그걸 잘 조화를 이루어서 비즈니스도 해야 되지만, 너무 지나치게 돈에 빠져 있지는 말아야겠죠. 돈에만 매여서 돈 주는 의뢰인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이런 사람을 보고 책에서는 ‘고용된 총잡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신문에나 뉴스에서 ‘어떻게 저런 걸 변호해 줄 수 있지?’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잖아요. 근데 엄청난 수임료를 받고 변호를 하잖아요. 그게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면 고용된 총잡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금 말한 것처럼 법조윤리공부를 통해서 조금 더 중립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너무 부당한 요구라면 의뢰인에게 ’No!’ 할 수 있는 그게 필요하다.

그 길을 이끌고 계시네요.그걸 가르치는 그게 쉽지는 않은데요. 예를 들면 언제나 그렇지만 요즘도 더더욱이 사회적인 이슈들이 참 많고, 엄청난 수임료를 제시하면서 도와달라고 할 때, 자기 신념에는 좀 아니지만, 돈을 생각해서 변론을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닥쳤을 때 어떤 경우에는 좀 No! 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좀 알려주고 싶은 거죠. 어떤 일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좀 거절하는 게 맞다는 걸 교육하고 알려주는 게 법조 윤리 수업이니까요. 그게 현장에서 얼만큼 적용되게 될지는 의문이죠. 우리 사회에서 돈의 힘이 워낙 강하니까요.

그래도 그 이야기들이 양심의 날을 좀 날카롭게 만들어 줬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 사례들을 들어서 수업 때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 ‘그래, 내가 로스쿨 처음 들어올 때는 공익의 대변자로 열심히 살겠다고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목표가 점점 돈 많이 벌고 권력 가지고 막 떵떵거리는 걸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거든요.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돌이켜볼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법조윤리 수업을 통해서 좀 제시를 해보고 싶은 거죠.

멋집니다, 파친님! 이제 제가 파친님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적응이 되고 계시죠? (웃음)
이제 어떻게 파친, 파랑의 친구가 되셨는지에 대해서도 좀 들어보려고 하거든요.
정귀순 이사장님이 첫 인연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 연을 맺어오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셔도 좋고요.

그건 정귀순 이장님의 매력인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정귀순 대표님의 다양한 매력을 느끼시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일에 있어서의 시작과 끝이 정말 분명하시다는 점이 있어요. 어떤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뭔지, 목적이 뭔지, 이런 게 분명하세요. 저도 그렇고 때로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을 하면서도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고, 일의 목저을 잘 모르고 할 때도 많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사장님과 몇 가지 일을 같이 하면서 느낀 건 이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한 어떤 분명한 목표 의식이 있으시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한 다음 그거를 혼자서 그냥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목적을 가진 리더가 목적을 잘 공유하지는 못하면서 자기 말을 따르라고 몰아가는 경우가 참 많은데, 제가 느낀 이사장님은 본인이 생각하신 일의 목적을 같이 일하는 분들과 공유를 해주세요. 그리고 각 사람들에게 맞는 일을 찾아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어지는 일의 성격은 다양하잖아요. 각자에게 맞는 일을 적절하게 분배하시고, 그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저에게 요청하시고요. 만약에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면 부담스럽고 힘들었을텐데 저도 그런 방식으로 참여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보람도 생기죠. 적절하게 목표 설정을 하고, 그 목표를 공유하고, 그 목적을 위한 활동을 잘 분배하고, 마지막으로는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의견을 나누고 피드백을 받으며 잘 정리하시잖아요. 그러면서 또 새로운 일에 대한 구상을 이어가시기도 하고요. 이사장님과 일을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어요.

지금까지 말한 게 일적인 영역이라면, 이사장님과 제가 이제 같은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저대로 장애인 영역에서 인권운동을 하고, 지역 인권위원을 하고, 이사장님도 이주민 영역에서 활동을 하시고, 인권위원장을 맡으시면서 더 넓은 인권 영역을 만나게 된 거죠. 그 부분에서 같은 고민에 빠진 거죠. 각각의 부문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야 되는데 이걸 어떻게 넘어서지, 하는 고민이요. 나는 이 분야에서만 쭉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저 분야에서만 쭉 있었기 때문에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시급성을 다르게 느끼기도 하는데, 이제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각각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장이 펼쳐져야만 다양한 인권 영역과 활동가들이 함께 한 마당에서 같이 어울려서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서로가 통한 거죠. 그래서 뭔가 부산에서 다양한 인권 영역의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이 함께 만나서 함께 교류하고 또 다양한 영역들이 서로 잘 조화될 수 있는, 파랑과 같은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고, 거기에 이사장님이 워낙 추진력이 있으시니까 추진해가시고, 저는 또 옆에서 도울 수 있는 부분에서 돕고. 저는 그게 큰 접촉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사장님의 일에 있어서의 나름의 체계적인 처리 방향과 또 비전에 있어서의 공유, 그게 저에게는 파랑과 계속 같이 좀 인연을 맺게 된 가장 큰 까닭이라고 봅니다. 만약에 일만 잘했다면 아마 일로서 만났다가 헤어졌겠죠. 근데 새로운 꿈이 이제 공유가 되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바운더리 없이 운동의 역량을 모아가야 한다는 그런 비전을, 그 고민의 시작부터 함께 나눠오셨던 거군요.
파친님의 고민을 묻는 문항에도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부산만의 인권 활동을 고민해보고 싶다고 서면으로 적어주셨는데 함께 이해되네요.
먼저 부산이 지닌 지역적인 한계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제가 볼 때는 이제 인적으로도 그렇고 물적으로도 그렇고 자원이 너무 많이 유출된 것 같아요. 서울이나 수도권 쪽으로. 갈수록 좋은 연구자들 또는 좋은 활동가들이 활동하고 연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물적으로도 이제 서울은 좀 더 많은 후원자들과 기업들이 있고, 다양한 재단이나 단체들이 인권에 대한 의식도 높고 감수성이 높다보니 좀 물적인 후원이나 지원들도 훨씬 좀 풍족하게 돌아가는 게 사실이고요. 그 지역도 물론 다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비교하면 훨씬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상대적으로 부산은 그런 부분도 좀 약하지 않나 싶고요. 그래서 인적으로 연구자나 활동가들이 잘 육성되고 양성되기도 어려운 환경인 것 같고, 물적으로도 좀 그런 토대가 좀 잘 구축이 안 되는 어려움이 지금 현재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이 두 가지 부분을 좀 잘 해결해보는 게 저희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래서 일단 인적인 부분을 어떻게 할 건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제가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대학과 연계해서 활동가들이 좀 더 훈련 받고 체계적으로 양성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거예요. 이를테면 인권대학, 또는 인권학과, 이런 것들을 좀 한번 만들어보자. 왜냐하면 활동이든 봉사든 다양한 형태로 인권과 어떤 접촉점이 생겨서 인권 영역에 들어온 분들이 인권영역에 더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활동의 장으로 연결하는 그런 플랫폼이 너무 없는 거죠.

그리고 좀 안정적인 직업으로서의 인권 활동가들이 육성되는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았으니 부산에서라도 새로운 모델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요. 성공회대학의 NGO 대학원 같은 경우도 이제 서울에 있고, 부산의 경우에도 그런 인권 학과 또는 인권 대학 이런 게 생겨서 좀 인권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그분들이 인권영역 일터로 잘 연결될 수 있도록 연계하고요. 자발적인 헌신, 봉사로 운영되는 그런 인권 영역도 필요하지만, 조금 더 구조적으로 사람을 양성하고, 인권연구로 석사, 박사를 받게 해서 연구자도 양성하는 그런 체계를 갖춰보고 싶어요. 이 부분이 인적인 부분이라면 파랑이 생겼으니까 파랑에서 좀 좋은 아이디어들을 많이 만들어서, 물적인 토대를 또 굳건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또 우리가 많이 배워서 또 부산 지역에 인권 운동 기부금 관련한 제도들을 좀 많이 개발하면 좋지 않을까. 모금 부분은 제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잘 모르지만 교육과 양성, 연구와 활동 부분을 조금 더 체계화하고 공적인 조직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회복지도 예전에는 다 봉사의 영역이었잖아요. 그냥 어려운 애들 돌보고 하는.체계화 되지 않았죠.그냥 어린이들 고아원에 모아가지고, 선한 원장님이 계시면 그분을 엄마라고 부르고 그냥 가족처럼 따르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자원해서 음식해주시고 빨래해주시고… 이런 차원이었다면, 그게 점점 체계화되면서 사회복지학과가 만들어지고 그런 복지 제도가 국가에 편입되면서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이런 것들이 다 체계화되어서 국가의 지원 하에 운영되잖아요. 물론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지만. 그런 것처럼 인권도 일부는 좀 공적인 제도로 우리가 체계적으로 운영해서 제대로 된 공익활동가, 인권운동가들을 양성하고 또 그중에서 연구하실 분들을 더 육성해 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인권운동에는 여전히 자발적인 영역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부산 지역의 대학들, 교육기관들과 연계해서 인권학과나 인권 대학을 만들어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인적인 어려움을 타파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문제는 분명하지만 이제 수도권이 어떻다, 지방이 어떻다, 너무 남만 탓할 게 아니고 우리가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은 되게 당연하게 공공이 책임져야 되는 영역들이 있는데 아직도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고요.

제가 지난번 회의 때도 잠깐 그런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부산의 인권 단체 활동가들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냈잖아요. 그 안에 보면 ‘인권 활동가들은 공익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써두었는데, 그런데 그렇다면 공익 인권 활동가들에게 국가가 지원도 하고 월급도 주고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왜냐하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사적인 활동이라면 그거는 개인이 알아서 장사하듯이 개인의 역량에 맡겨야 되겠지만, 이게 공적인 영역이고 정말 공익에 필요한 활동이라면 국가가 제대로 살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권활동가들도 체계 안에서 보호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게 되도록 법을 바꾸고 하는 일은 제가 못하겠지만 그런 자격을 약간 공인화 하는 그런 작업들은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복지의 모델을 우리가 인권 영역에서도 도입해 보자. 그런 구상을 하고 있어요.

저는 행정이 인권이라는 단어, 사실은 어떤 프레임이나 관점이겠죠, 그걸 굉장히 거부하고, 우리가 인권 쟁취의 영역으로 주장하던 것이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대부분 복지체계 안으로 들어가고, 그 체계 안에 너무 당연하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직도 밖에 나와있을 때 우리가 ‘이건 기본권, 인권이다.’라고 주장하는 구도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찌 보면 이제 이른바 집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권력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인권이라는 게 심히 불편한 거죠. 그 자리에 갈 때까지는 하나의 선전 수단일 수 있는데, 그 자리에 서고 나면 부담스럽고. 자꾸만 내가 하려고 하는 어떤 정치나 행동을 가로막는 걸로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그거를 그렇게 바라보지 말고 과감하게 인권도 하나의 공적인 제도로 좀 수립을 하자는 거죠.우리가 늘 좀 목말라 있는 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또 활동을 하지만, 그 일의 당위에 대한 이론 체계, 정신 체계 이런 게 좀 필요하다고 느끼거든요. 지금은 그냥 주어진 일을 막 쳐내기가 급급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10년, 20년 하다 보면 소진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이게 한두 권 그때 그때 읽은 책으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는 건 좀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100% 완전한 건 아니겠지만 대학의 두 학기, 세 학기 정도를 들으면서 전체적인 인권의 어떤 뼈대를 좀 우리가 제공할 수 있다면 하고 바라죠. 일반 시민도 괜찮고 또 기존에 활동하셨던 분도 괜찮고 또는 이제 요즘은 또 고령화사회니까 사회생활을 다 마치신 분들도 교육을 받으면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시야도 넓히고, 또 그런 분들이 또 현장에 연결되기도 하는. 나이와 관계없이 자기 영역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직장에서 정년을 마쳤는데, 늘 마음속에는 장애인, 이주민, 노동자, 소수자에 대한 그런 관심이 있었던 사람인데 직장을 다니다 보니까 제대로 된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어요. 근데 만약에 어느 대학에 어떤 과정이 개설되고, 내용을 보니까 다양한 인권 주제들을 공부할 수 있고, 또 현장 체험과 실습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초기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지원을 하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수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가장 큰 목적은 활동가와 연구가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이겠지만 사회적 인식을 좀 개선하는 기능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봐요.

빨리 만들어 주세요. 제가 당장 진학해야 할 것 같아요.

꿈이에요.

파친님의 꿈을 저도 같이 꿈꿔봅니다. 이제 파친코 고정 질문 두 가지가 남았는데요. 먼저, 파친님에게 인권이란 무엇일까요.

음. 인권은 소망이다. 소망이라고 정의해보고 싶어요. 제가 소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권과도 연결지어 보고 싶어요. 소망은 현재의 불만과 불편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권도 현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겪고 있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좋은 통로가 되리라 생각하니까요.

송시섭 파친님의 2023년 파친코 인터뷰의 문을 열어주신 만큼, 추가질문!
올해 송시섭 파친님의 소망은 무엇인지요?

인권 관련해서는 방금 말한 것처럼 좀 장기적인 목표로 인권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양성 과정을 만드는 일의 전초 기지, 전진기지로서 좀 전에 회의에서 우리가 같이 고민했던 부산인권아카데미가 잘 뿌리 내리고, 우리 강사 선생님들을 잘 발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올 한해를 그렇게 잘 보내고 나서 진짜 2024년, 내년에는 인권 아카데미 1기를 한번 발족해 볼 수 있었으면 해요. 우리 파랑이 부산인권아카데미라는 브랜드를 인권교육의 신뢰받는 교육기관으로 만들어서, 아카데미에 좋은 강사님들 모시고 8회 내지 10회 정도 인권운동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기관, 꼭 알아둬야 할 중요한 쟁점과 논점 정도는 좀 듣고 수료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서 그걸 준비하는 한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참 기쁘네요. 파친님의 두 가지 소망 모두 다 이뤄지길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는데요. 이 질문은 이제 안 그래도 파랑의 친구인 파친님을 좀 더 당겨보겠다 하는 마음으로 답정너처럼 드리는 질문입니다. 파친님은 파랑과 어떤 친구가 되고 싶으신가요.

제 역량에 한계가 있어서 파랑의 다양한 활동 전부를 제가 다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아카데미 부분에서는 제가 힘이 닿는 대로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하고 돕고 싶어요. 파랑의 전체 활동에 대해서도 물론 당연히 관심을 갖고 도와야 되겠지만, 아카데미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 개인적인 소망은 물론이고 이사장님과 함께 꾼 꿈도 있으니까요. 이 아카데미를 잘 살려가고 향후 교육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의 시금석으로 잘 역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서 하여튼 제가 여러 면에서 열심히 한번 뛰어보겠습니다.

파친님 덕분에 저도 그런 비전을 공유받게 되어서 의욕이 더 많이 생겨요. 되게 마음이 설레네요. 감사해요.

저도 이야기하다 보니까 인권을 뭐라고 정의해야 될까? 물어보셔서. 제가 기본적으로 소망을 좋아하는 단어이긴 한데, 인권과 소망을 연결지어서 꿈을 생각해 보게 돼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73언론·기고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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