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모든 생명이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하기를– 정현주 파친님
이번 달에는 파랑의 든든한 후원회원님이자 메리놀병원 완화의료센터장으로서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을 돌보는 정현주 파친님을 만났습니다! 돌보는 일에 대해 파친님께 질문을 건넬 때마다 자신이 받은 돌봄을 간곡히 들려주시는 파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봄이란 무엇일까’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인권아카데미에서 종종 뵙곤 했는데 이렇게 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처음이네요. 혹시 파친님을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 파라솔 독자님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
네, 저는 하고 있는 일은 의사고, 병원의 의사로서 호스피스 환자를 돌보고 있는 정현주입니다.
파랑을 알게 된 건 정귀순 이사장님을 통해서고요. 사실 제가 병원 일만 하다 보니까 사회에 대해서 좀 무관심한 부분도 있고 잘 모르는 것도 많고 한데, 정 대표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이라 좀 더 관심 있게, 동시에 좀 더 편안하게 파랑에서 하는 아카데미에 찾아가 강의도 듣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대표님이) 파친코 인터뷰도 한 번 해보라고 하셨을 때도 겁 없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후회됩니다. (웃음) 그래도 현지씨가 글로 예쁘게 편집해서 내보내주실 거라 믿고요.

(웃음) 아… 모자란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스피스 환자를 돌보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호스피스라는 단어가 아직 낯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호스피스는 적극적인 항암치료를 통한 완치나 치료를 통한 회생이 불가능하고 여명이 몇 개월 이내로 예상되는 환자분들을 적극적으로 돌봐드리는 곳이에요.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증상을 관리하고 삶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지내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몇 개월 안 남았다는 선고 받았을지라도 이 환자 분이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증상들이 있어요. 제일 많은 게 암환자의 경우에 통증, 그리고 호흡 곤란,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해하시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심리적인 부분들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돌봄이 많이 필요한 거에요.
보통의 대학병원에서는 항암치료가 끝났으니 더 이상 치료해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껏 치료한 당사자와 보호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더 해줄 게 없으니까 그냥 나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가족이나 환자 입장에서는 버림받은 느낌도 들고요. 이 정도의 상태에 처한 환자들이 집에 돌아가서 생활하기는 좀 힘들어요. 암이나 불치병이 그대로 멈춰있는 게 아니라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고 더 심해지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에 맞춘 돌봄이 필요한 거죠. 증상 관리도 필요하고, 죽음을 앞둔 환자의 마음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갈 거예요. 그걸 표현할 수도 있고, 표현하지 않기도 하세요. 그런데 그 표현이 ‘내가 불안합니다.’, ‘내가 우울합니다.’,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거든요. 잠을 못 잔다든지, 자꾸 화를 내고 가족들한테 짜증을 낸다든지, 그런 모든 게 가족들 입장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만, 이제 더 이상 치료할 게 없다는 말을 들은 환자들에게는 ‘의사도 포기했고, 나는 이제 죽는다.’는 마음이 들다 보니 그로 인해 일어나는 고통이 많아요.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상호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죠. ‘죽음에 대한 준비’에 대한 가족들의 생각도 저마다 다르고요. 나쁜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가족도 있지만, 또 어떤 식구들은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갈등이 있었거나 분노와 원망스런 관계에 있었다면 그 모든 게 더 크게 터져 나오기도 하고요. 그런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돌보는 곳이 호스피스고요.
정말 복합적인 돌봄이 필요한 일이네요.
그렇죠. 그리고 호스피스 기관들이 많이 생기고 그동안 홍보도 많이 되고 방송이나 드라마에도 나오고 하지만 아직도 인식은 많이 부족한 편이에요.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학회가 생긴 지도 30여년 되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호스피스를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병원에서 의사가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함을 알리고 호스피스를 권하게 되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요. 죽으려고 가는 곳, 죽기 직전에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그래요. 호스피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데, 사실 저희가 ‘죽어가는 사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받는 거거든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죽음을 앞둔 사람이잖아요. 그 시간이나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아직까지 환자는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우리보다 끝이 좀 더 훨씬 가깝게 올 사람들에게 도움을 적극적으로 주는 곳인데,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기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시고, 어떤 분들은 ‘항생제도 안 써주고, 주사도 안 주고, 죽게 버려둔다.’고까지 오해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면담할 때 이야기 나누다 보면 황당한 일들이 많아요. 호스피스는 연명 의료를 안 하는 거지, 증상 관리는 다 하거든요. 임종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생명을 연장시켜서 환자의 고통받는 기간만 연장하는 치료를 안 한다는 의미예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모든 치료를 다 안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마지막에 환자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일단 편안해야 해요. 통증이 없어야 하고 증상이 완화되어야지만 그런 게 가능하거든요. 호스피스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좀 더 친밀하게 보내면서 마무리할 수 있거든요.
호스피스 일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지네요.
이 일을 하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어요. 가정의학과를 졸업하고 봉직을 하고 있다가 이제 개업을 했는데, 개업하고서 동네 주치의로서 재미있게 지냈어요. 환자가 가족 단위로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아이들 다 같이 보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1퍼센트가 있었어요. 재미있긴 한데 무언가 좀 보람이나 만족감이 없는 느낌. 그러다 보니 무언가 다른 내 길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가톨릭 신자라 기도하면서 그 길을 고민해봤고, 그러면서 좀 더 봉사하는 일을 하는 게 나한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시기에 해외 의료봉사단을 모집하면 그런 곳들도 다녀오고 그랬었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을 하나 만나게 됐어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이라는 책이에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정신과 의사로 수많은 말기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한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하신 분이 쓴 책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연구할 때 많이 인용이 되는 그런 분인데, 이분이 몇 권의 책을 쓰셨거든요. 인생수업, 상실수업 등등.
이것들이 대부분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이런 내용들이에요. 그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몰입이 되면서, ‘내가 할 일이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스피스에 관심을 처음 가지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내가 호스피스를 공부하고 일을 할 수 있을까 찾아봤더니, 서울에 일산국립암센터에서 호스피스 전문 인력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을 몇 주에 걸쳐서 진행하는 거에요. 한 세 달 정도를 수요일 오전 진료 마치자마자 기차 타고 가서 수업을 듣고 돌아왔죠. 그게 20년 전쯤의 일이에요. 무궁화를 타고 가서 11시쯤 무궁화를 다시 타고 돌아오면 새벽 4시쯤 부산역에 떨어져요. 집에 와서 씻고 아침에 진료를 보러 출근하고.
그렇게 세 달인가 했는데 피곤한 줄도 모르고 했어요, 이게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소망했어요. 제가 개인병원을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병원에 암환자가 있는 일은 없잖아요. 호스피스 교육받은 걸 제 개인병원에서 쓸 일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될까, 하느님은 나를 어떻게 이끌어가실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용호동에 있는 부산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을 짓고 호스피스를 운영할 계획이니 제가 가서 일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렇게 2008년에 제가 성모병원으로 들어갔는데, 8월 여름 휴가 때 우리 원장님이 부산가톨릭의사회에서 캄보디아 의료봉사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갔는데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때 갔던 곳이 캄보디아 시골이었는데, 지역 이름은 지금 기억이 안 나지만, 잘 다녀왔고 다녀오고 나서도 제가 계속 캄보디아앓이를 하고 있는 거죠. 캄보디아가 그리워서 한 달 가까이 자려고 누워도 캄보디아 생각이 나고, 뭘 해도 캄보디아가 어른거리고. 캄보디아 생각 뿐이라, 캄보디아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이 나라와 사람들이 어떤 곳이고 어떤 사람들인지 공부하고 그랬어요.

무엇이 그렇게 캄보디아를 사랑하게 만들었나요?
모르겠어요. 그 자연도 그렇고, 아이들도 너무 순수하고 예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아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들었어요. 어떤 장소나 대상에 대해서 이렇게 흠뻑 빠지는 감정을 느껴보는 게 저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그해 겨울부터 시작해서 여름, 겨울마다 휴가를 다 나누어 쓰면서 내 돈 들여서 캄보디아에 다녀왔어요. 혼자서라도 약을 들고 가서 장애인학교나 시골 교외지역, 수녀원 같은 곳에 가서 동네 사람들을 진료하고 그렇게 몇 년을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2014년에 우연히 그쪽에 계시는 신부님이 캄보디아에 와서 사람들을 좀 돌봐주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셔서 제가 그때 바로 병원을 그만두고 캄보디아에 갔어요. 갈 적에는 1년 동안 있다 오겠다는 마음으로 갔었어요. 저는 제가 굉장히 잘할 줄 알았어요. 몇 년 동안 오갔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충분히 적응이 되고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그냥 가서 보는 거랑 거기에 아예 사는 건 다른 문제더라고요. 처음 한 달 정도는 사람들과 같이 프놈펜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이제 저를 시골에 있는 조그만 성당으로 보내서 그 안에 있는 여학생 기숙사, 기숙사라고 해도 2층집이었지만, 어쨌든 거기 가서 아이들도 돌보면서 말도 조금씩 배우고, 여유가 되면 동네 사람들도 조금씩 돌본다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갔어요.
태국 수녀님 세 분 정도 계시고 아이들도 돌보고 농사도 지으면서 지내시고 계셨는데, 성당의 조그만 방에 진료실을 차리고 시작을 했는데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첫 번째로는 몸이 아프더라고요. 몸에 두드러기랑 알러지가 너무 심했어요. 얼굴이랑 목이 가렵고 너무 부어서 힘들었는데, 저는 의사인데도 약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밤에 더워서 증상이 심해지는데도 그걸 어떻게 해볼 생각도 못했어요. 그 지역에도 호텔까지는 아니어도 여관이나 이런 데라도 가서 에어컨 바람 쐬고 쉬어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은 아예 못하고 계속 거기서 지내면서 몸은 낫지를 않았죠. 그런데 나중에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망고 알러지가 있더라고요. 밥도 잘 못 먹었거든요. 밥 하나, 반찬 하나 정도로 단촐하게 먹는데, 그 반찬 하나가 완전히 못 먹어본 맛이고, 적응하기 어려운 맛일 때가 많아서 제가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닌데도 먹는 게 힘들더라고요. 너무 덥기도 하고.
천장만 얹어둔 곳에서 다같이 밥을 먹는데 저녁이면 전등을 켜둔 탓에 벌레들이 모여들거든요. 모여있다가 우리한테도 붙고 떨어지고 그래요. 저는 처음에 아이들이 밥 먹으러 나올 때 왜 수건을 다 그렇게 목에 두르고 오는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벌레가 옷 속으로 들어가면 너무 힘드니까 그걸로 막아둔 거였던 거예요. 그러니 이게 밥 먹는 데에도 애씀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애들이 워낙 착해서 제가 자기들 엄마 뻘인데 마치 자기 동생들처럼 챙겨주는 거예요. 밥 먹는 것도 힘들고 그래서 초반에는 망고를 그렇게 먹었거든요. 망고가 참 다양하고 너무 너무 맛있기도 하고 밥도 잘 안 들어가니까 먹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아픈 거였던 거죠. 게다가 제가 갔던 4월이 특히 망고가 맛있는 때였어요. (웃음) 어쨌든 그 몇 달 동안 육체적으로도 힘들었고, 거기에 면역력도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몇 배로 더 힘들었던 거겠죠.
그리고 그동안 제 자신을 너무 깊이 만나게 된 거에요. 한국에서는 아쉬울 게 없고 부족할 게 없이 살았잖아요. 제가 가난한 상황에 한 번도 놓여본 적이 없었어요.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사회적인 결핍, 관계의 결핍 같은 부족함들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 자신을 진솔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왔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죠. 아이들을 위해 밥 하나 해주지도 못하고, 번역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진료도 하기 어렵고 내가 가진 의사로서의 기능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 같고, 제가 너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성당 안의 작은 기도방인 경당에 앉아서 기도하는 시간들이 많았어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제가 너무 못 먹어서 살이 정말 많이 빠졌었는데,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제가 조금이나마 먹고 있고, 잠도 자고 있고, 그런 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긍정적인 부분을 좀 더 보게 되면서 마음이 회복되었고, 그래서 이제 다시 언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서 공부를 하러 프놈펜으로 올라오게 되었어요.

프놈펜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데 저를 초대하셨던 신부님이 이렇게 있다가는 아프고 폐인될 것 같다고 느끼셨는데 그냥 병원 근무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병원에 가서 근무를 해요. 언어가 안 되는데. 그런데 거기에 마침 헤브론 병원이라고 있었어요. 왜 이번에 김건희 여사가 찾아가서 심장병 환아 안고 있던 병원 있잖아요, 거기에요. 그 병원을 한국인 의사가 설립을 했거든요. 제가 그 병원에 찾아가서 일하고 싶다고 하니까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그때만 해도 정말 좋았거든요. 그때 한국인 의사도 몇 분 계셨고, 선교병원이다 보니 다들 그런 마음으로 와계신 분들이라 인격적으로도 좋고 배울 점이 많은 선생님들이어서 1년 가까이, 한 8,9개월 정도 함께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캄보디아의 의대 시스템은 우리랑 많이 달라요. 상위 몇 퍼센트의 학생들만 국립대학에서 전공과정을 할 수 있고 대부분은 그냥 약국을 하거나 그러는 정도인 거에요. 다소 전문성이 덜하죠.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떨어져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의 레지던프 프로그램처럼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문의료인을 양성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했어요. 헤브론 안에도 내과, 외과, 흉부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마취통증 등 여러 과가 있었으니까요. 같이 공부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회진도 돌면서 가르쳐주었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생각만큼 수련이 쉽지 않았던 것이, 우리랑 생각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우리는 우리가 검사하고 결과도 다 챙겨보고 그날 해야 할 일은 최대한 해내는데, 이 사람들은 전부 다 나중에, 나중에, 하고 미루고, 뭘 물어봐도 ‘아이 돈 노’로 회피하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가 분명히 이 환자는 이 부분이 안 좋으니 챙겨보라고 말했는데도 그걸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저는 이해가 안되고, 어떤 시점에서는 화가 나기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이 나라에서는 병원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병원에 오려면 새벽부터 출발해서 오는 사람들이 많고, 병원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크게 아파야 오는 거고, 입원까지 한다는 건 정말 더 크게 위중한 사람들이라는 건데,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한 거거든요.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의료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이었죠. 그렇다 보니 의견 충돌도 있고 화를 내기도 했는데,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건 또 그 사람들의 문화인 것 같더라고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전에 한 번도 그런 수련을 안 받아봤기 때문에 환자를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것 자체도 무시하게 되고,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니까 난 모르겠다고 하고 말아버리는 거죠.
그렇게 8개월 정도 사람들과 정을 쌓고 지내다가 이제 캄보디아의 의료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좀 생기고 그전보다는 언어도 좀 늘고 해서 다시 시골로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캄보디아에 1년만 있기로 했었는데, 이제 내가 시골에 가서도 다시 잘 지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1년을 더 연장하고 헤브론 병원의 의사 선생님들, 수련생들과 애틋한 마지막 인사를 서로 나누고 예수회를 통해 시골 각지의 성당을 한 달, 두 달씩 머물러가면서 진료를 봤어요. 성당에서 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성당의 신부님을 따라 더 외지에 있는 공소를 따라 다니며 미사를 보고 진료를 보기도 했어요. 더 외진 시골로 가면 어떤 분들은 제가 살면서 처음 만난 의사이기도 한 거예요. 그 마을에 의사가 처음 온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곳의 사람들은 환경도 열악하고 약을 써본 적도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엄청 잘 낫기도 해요. 화상도 막 2도 화상 정도 되는 화상을 다리 전체에 입으시고 하신 분인데, 한국 같으면 매일 드레싱하고 비싼 약 쓰고 항생제 쓰고 해도 감염될까봐 난리가 났을 텐데, 거기는 제가 일주일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데 그냥 약 좀 먹고 치료법 좀 알려드리고 집에서 소독을 제대로 하셨을지도 알 수 없는데도 그 다음에 가보면 좋아져 있어요. 약을 안 써 버릇 하니까 약발이 너무 잘 받는 거죠. 조금의 항생제도 엄청 잘 받곤 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밖에도 캄보디아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참 많아요. 제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캄보디아에서의 그 시간 없이 쭉 한국에서 호스피스 일을 해왔다면 지금처럼 못 할 것 같아요. 너무 소진되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인연이 제게는 정말 너무나 감사한 인연이고 소중한 시간이에요. 제가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했기에 지금 메리놀 병원에서 일할 수 있고 또 호스피스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2016년에 돌아와서 한두 달 정도 쉬다가 메리놀병원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있잖아요. 캄보디아에 이번에 김건희 여사도 가서 심장병 어린이 만나고 오고 그랬듯이, 캄보디아에는 심장병 환아들이 많아요. 우리나라도 옛날에 심장병, 심장판막증 걸린 어린이들이 많았거든요. 지금이야 발견도 일찍 되고, 여러 가지 감염병으로 인한 판막 질환에 걸릴 확률이 많이 줄어들고 했는데, 캄보디아는 아직도 많거든요.
국가의 개발정도나 경제성장률에 따라 질병의 경향들이 나타나기도 하는군요.
맞아요, 아무래도 감염병이 많을 수 밖에 없죠. 특히 교외지역은 수질이라든지 상수도 개념이 없으니까 연못의 물을 개도 먹고, 소도 먹고, 사람들 떠다 먹고, 정수해서 걸러 먹는다는 개념이 별로 없거든요. 더운 나라니까 끓여 먹는 개념도 없고요. 그래서 그 물을 그냥 마시니까 사람들한테 수질 관련 병들이 생기게 되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가서 우물도 파주고 정수 시스템도 깔아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머물렀던 곳에도 정수기 기능을 하는 독이 있었거든요. 그 독에다가 비가 올 때 빗물을 받았다가 간단한 정수시스템 약제를 넣고 거른 물을 우리가 먹곤 했어요. 그런데 현지인들에게는 그런 간단한 시스템도 없으니까 그냥 비가 올 때 양동이에 받아 먹는 정도지 그걸 끓여 먹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우물 파주기 사업을 하는데 그것도 문제가 너무 많아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있을 때는 우물을 파는데도 비용이 천차만별이었어요. 얼마나 깊이 파느냐에 따라 돈이 다르게 드는 거예요. 그런데 우물을 얕게 파면,
금방 마르나요?
금방 마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땅에 있는 오염 물질들이 지면으로 다 흡수가 되면서 그 물 자체가 오염되는 거죠. 오히려 더 오염된 물일 수도 있게 되는 거예요. 동물의 변이나 사체들도 섞일 수 있고. 그러니까 깊게 파야 맑은 물을 먹을 수 있어요. 얕은 우물물을 먹고 오히려 병에 더 많이 걸리니까 사람들이 그 우물을 막고 오히려 다시 연못 물을 먹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색내기 좋아하잖아요. ‘내가 거기 가서 내 이름으로 우물 하나 팠다.’ 그걸 하고 싶어서 우물을 파고는 그걸 그냥 두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표시해서 붙여놓기도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업적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물을 제대로 파야 하는데 제대로 파주지 않으면 도움도 안되면서 기분만 내는 거죠.
그런 일들을 보면서 도움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제대로 된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의료 봉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며칠씩 의료봉사 가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도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광산에서 일하고 옥외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고 해서 백내장 환자들이 많거든요. 백내장 수술 같은 건 가서 해주면 정말 효과가 좋아요. 한 2박3일 동안에도 환자 상태 다 점검하고 수술까지 끝낼 수 있거든요. 환자는 개안이잖아요. 세상을 보게 되는 거니까 그건 정말 도움이 되는데, 나머지 만성 질환이라든지 이런 혈압, 당뇨, 관절 질환 같은 건 며칠 가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가서 보니까 생활 습관하고도 많이 관련이 있는 부분인 거예요. 그건 지속적으로 주치의로서 이야기해주고 관리해줘야 하는데, 단기의료봉사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의료 봉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여럿이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야 하고 호텔에 머무르고 음식을 사 먹고, 그런 시간과 비용을 헤아려봤을 때 우리가 현지에 계신 분들에게 약을 전달하고 교육을 시키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은지 하는 고민도 좀 들더라고요.
캄보디아는 선생님께 정말 많은 고민을 안겨준 공간이자 시간이네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정말 낯선 경험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제가 커지는 느낌. 제가 하는 일들이 일반 의사들과 다른 점이 있잖아요.
다른 의사들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저는 어떻게 보면 죽이는 의사예요. 잘 죽도록 돕는 의사. 잘 보내드리려고 일하는 의사.
그래서 일반 의사들이 생각하는 치료의 개념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해요.
생각해봐요, 우리가 다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가면이라고 하면 너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집에서 혼자 있을 때랑 사회생활을 할 때의 얼굴이 다르잖아요. 어떨 때는 뭐가 진짜 내 모습인지도 모르고 살아갈 때도 많고요. 그래도 내가 건강할 때는 그게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되죠.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일 수 있고 어느 정도 연출도 할 수 있고, 그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이제 임종을 앞두고 환자가 몸도 마음도 아파서 들어오시게 되면, 내 몸이지만 내가 컨트롤할 수 없고, 내 마음도 내가 다스릴 수가 없으니까 네이티브한 나의 모든 것들이 그냥 다 드러나버려요. 가족들은 당황하면서 ‘이런 분이 아닌데’ 하고, 환자 스스로도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보게 되니 당황스럽고 더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죠. 그리고 우리도 힘들죠.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고 동행하면서 가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당신 그러는 거, 나랑 관계없는 일이야, 나는 그냥 약만 쓰고 말 거야,’ 이렇게 할 수 없는 게 완화의료, 호스피스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참 수련이 많이 되어야 해요. 삶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많은 경험치를 쌓아두는 것이 여러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돼요. 상대를 이해해야 도울 수 있어요. 이상한 짓을 하거나 밉게 굴어도 ‘그럴 수 있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이번에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니까 주인공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이니까 그렇지’. 사람이니까 이해받을 수 있고 사람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삶의 폭이 좀 넓어져야 해요. 환자들도요, 보면 살아온 게 다 나와요.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면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잘 살아야겠다.’…
돈이 많고, 적금이 많고, 그런 것도 다 아니고요. 가족이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 않고요. 조금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어떤 한계치, 경지를 넘어서면 모를까, 신앙이 있고 없고도 때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냥 그 사람이 살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배려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경계 없이 품을 넓히면서 살아왔는가에 따라 마지막 시간도 그렇게 살아낼 수 있겠더라고요. 그게 평상시에 안되는데 죽음을 앞두고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거든요. 마지막에는 그냥 그동안 살아왔던 게 드러나는 거라 어떻게 애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잘 살아야 잘 죽는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인 거죠.
그러니까 좋은 죽음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살아온 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좋은 죽음, 나쁜 죽음을 규정하기도 하는데, 제가 호스피스 의사로서 겪어본 바로는 좋은 죽음이 아닌 건 없는 것 같아요. 다 그 나름대로 최선이에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모습을 보였든지 간에 그냥 그 사람에게는 그게 최선이었고, 다 좋은 죽음이지만 다만 좀 더 가족들하고 따듯한 말을 나누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서로에게 상처준 것이 있으면 미안하다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 그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지요. 결국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돈이 앞선 갈등이 생긴다든지, 이미 가지고 있는 갈등이 더 심화된다든지 그런 모습을 보면 좀 많이 안타까워요.
환자의 가족과 주변분들도 엄청난 심경의 변화와 내적 갈등을 겪게 되겠네요.
그렇죠. 지금 코로나 시기라 다른 병실은 지금 면회가 안되지만 호스피스는 최대한 면회가 가능하도록 해요.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전보다는 면회 제한이 있지만 보호자들과 최대한 만나실 수 있도록 하죠. 가족들을 만나는 게 많은 환자분들게 위로가 돼요. 위중하신 분들도 호스피스 병동에 많이 계신데, 이 분들이 중환자실로 가시면 가족 면회가 안되거든요. 옆에 있어줄 수가 없어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 큰 장점이죠.
메리놀병원 호스피스 병동은 꼭대기층 7층에 있어요. 전망도 좋고 햇볕도 잘 들어서 되게 밝고 따듯한 기운이 있고, 근무하는 우리들도 친절하고 밝게 대하려고 하고요. 그러니 사람들이 와보고는 놀라요. 사람들이 막연하게 사람들 표정도 시무룩하고, 울고 불고, 뭔가 음침하고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줄 몰랐다고, 이런 줄 알면 진작 올 걸, 하시죠.
고민을 오래 하시는 분들이 꽤 있군요.
망설이다가 못 오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돌아가시고 나면 못 오시잖아요. 망설이다가 못 오시고, 병실이 항상 여유가 있지 않으니까 기다리고 계시다가도 못 가겠다고도 하시고, 겨우 마음을 먹고 왔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이 진행이 되어서 며칠 못 계시고 가시는 분들도 계세요.
머무르시는 날도 다 다를테니.
다 다르니까 저는 되도록 좀 더 많은 시간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으면 좋겠죠. 좀 더 준비할 수 있고 천천히 생각해보면서 내가 잘 살았다, 내 삶이 이만하면 되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존재적인 위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라요. 그런 위로는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껴야 하거든요. 우리는 그저 최대한 도와드릴 뿐이에요.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가족분들과도 소통하고, 음악 치료나 미술치료, 원예 같은 여러 프로그램들도 운영하고요.
몸이 아픈 것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해서 사는 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좀 죽게 해달라.’ 이런 분도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그러시는지 이유를 물어보면 제일 많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집에서는 가장으로, 직장에서도 어떤 역할들을 맡으면서, 사회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고 가족들한테 폐만 끼친다’고 생각을 하고,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특히 일만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살아온 시간을 통해 지금이 된 거니까 살아온 시간을 들여다보고 지금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 이런 것들을 저희들도 말씀드리고 환자분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도록 지지해드리죠.
호스피스 안에서 환갑 잔치, 칠순 잔치, 이런 것들도 해드려요. 퇴원하실 수 없으니. 얼마 전에는 할아버지가 키우셨던 손자가 해군사관학교 졸업을 하면서 뱃지를 수여받는 게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 손자를 직접 키웠고, 너무 사랑하고 손자의 수여식에 할아버지가 가볼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자리를 마련해서 손자가 병원에 와서 제복을 갖춰 입고 할아버지가 뱃지를 달아주는 기념식을 마련해서 사진 찍고 현상해드렸거든요. 가족들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서 그 사진을 가지고 계시면서 보세요. 그리고 그 사진은 나중에도 두고두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환자분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많은 가족분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려 오세요.
떡도 해가지고 오시고, 마실 것이며 과일도 사다 주시고, 여기 있는 동안에 참 행복했다고.
정말 귀한 일이네요. 선생님도 그런 시간을 함께 하면서 아까 가정의학과 개원하셔서 좋지만 아쉬우셨다던 그 1퍼센트가 좀.
채워졌죠, 채워졌어요.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는 그런 부족감이 없어졌어요. 솔직히 힘들 때도 많지만 제가 전에 느꼈던 부족함은 없어졌죠. 사람의 삶이라는 게 참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길로 흐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가야 할 길로 오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한 게, 의대에 가고, 전공을 정해야 할 때 제가 원래는 재활의학과를 하고 싶었거든요. 대학 다닐 때 방학 때가 되면 남천동에 있던 소화영아재활원에 봉사활동을 다녔거든요.
지금은 감만동으로 옮겼는데, 그때 장애 아이들과 시간을 가지면서 재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그 때 재활의학과가 굉장히 인기 종목이 되었고, 부산에서는 그 과를 수련받을 수 있는 병원도 없고, 서울까지 갔는데도 어떻게 잘 안 돼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가정의학과가 다양한 걸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하게 됐는데 이게 참 잘 된 것 같아요.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닌 곁길로 가게 되더라고 그게 잘못된 시간이 아니고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 모든 시간이 다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되고, 감사하게 돼요.
잠깐의 짧은 대화를 더 나누다 정현주 파친님은 병원의 콜을 받고 급히 환자를 만나러 가셨답니다. 바쁘신 중에 긴히 시간 내주신 현주 파친님, 감사합니다! 🙂 잠깐 사이에 삶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살아온 삶의 그릇에 그 모양대로 담기는 것이 죽음이라는 메시지가 인상깊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요? 인권운동가이자 레게음악가였던 밥 말리의 유언을 전하며 파친코를 마무리합니다. 다음 파친코를 기대해주세요!
“돈으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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