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천연옥 / 참으로 빛나는

지금 파랑은

참으로 빛나는

무슨 월요 모임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넣으면 천연옥 장판, 천연옥 매트, 천연옥 김치통…. 건강에 좋은 온갖 물건이 주르르 뜬다. ‘민주노총’ 혹은 ‘노동운동’을 하나의 세트처럼 키워드로 넣어야 그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뜬다. 관련 이미지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마이크를 잡고, 피켓을 든 모습이 전부다. 그는 늘 거기에 있었다, 투쟁과 해고의 현장에서 참으로 빛을 내며.

부산의 노동운동을 생각하면 천연옥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지녔던 직함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비정규특위 간사(2002.8.~2003.1.), 여성연맹 부산지역 조직부장과 부산지하철청소용역노동조합 사무국장(2003.2.~2007.6.), 공공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처장(2007.3.~2009.12.), 민주노총 부산본부 부본부장(2010.1.~2011.12.), 비정규위원장(2011~2017), 부산지역 일반노동조합 수석 부위원장(2015~2018)….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한동안 운동과 거리를 둔 적도 있다. 85년에서 92년까지는 학생운동과 사회단체 활동을 했지만 97년부터는 학습지 교사로 일했다. 인생을 바쳐 변혁 운동을 하려고 했던 결심이 흔들리는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다.

우리 노동운동계에는 고질적인 가부장적 태도가 남아 있었다. 선배 그룹이 구상한 대로 후배들에게는 실행만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활동가로서 온전히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운동을 한다는 조직 안에서, 민주주의라는 게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연옥은 현장을 떠났다. 다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광고면에 난 학습지 교사 모집 안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자격 조건이 무조건 대졸이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불문학과를 다니다 말았고, 한의대에 다시 입학했지만 자퇴한 상태였다. 학교에서는 재입학을 하라고 안내문이 왔지만, 한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연옥은 취업하기 위해 학사고시를 준비하고 대졸자격을 땄다.

생활의 방편으로 시작한 학습지 교사였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 오죽하면 지점장은 동료 학습지 교사들에게 “천선생같이만 일해라.”라고 추켜세웠다.

일주일에 한 번, 회원 가정에 방문해서 학생을 만나 교재를 전달하고 잠깐 지도하는 것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혹시 만나지 못해서 교재만 던져준다면 너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가는 재방, 또 한 번 더 가는 삼방까지 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IMF 때문에 다들 경제가 힘들 때, 한 달에 몇 만 원인 학습지는 저소득층 서민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사교육 선택지였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절대 소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지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다른 쌤들은 회원을 뺏긴 거지, 나 때문에 회사한테 더 쪼이게 된 거고.”

회원 수가 많아지고, 회원당 수수료율이 다른 교사보다 더 올라가는 게 좋았다. 회원들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열심히 하니까 이런 보상이 오는구나. 이거라도 해야 아이들이 한글이라도 떼고 하니까 최선을 다하자 이런 마음이었다. 그럴수록 학습지 교사의 노동 조건은 더 열악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밥벌이 수단으로 택한 이 일이 연옥을 다시 노동운동으로 끌어당길지는 생각도 못 했다. 그때까지 노동자라고 하면 공장에서 일하는, 협소한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습지 교사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99년도 재능교육의 학습지 교사 노조가 생겼다. 그가 몸담은 대교 눈높이에도 노조가 생기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때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내가 다니는 직장에 노조가 생기는데 가입을 안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런데 세상에나, 그 많고 많은 부산지역 눈높이 선생님 중에 노조원은 4명뿐이었다. 우체국보다 지점이 많다는 회사에 4명뿐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당장 노조원으로서 일부터 하는 게 급했다.

노조 활동을 하느라 바빠지자, 일하던 지점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월요일 회의와 교육에 빠졌다. 지점장이나 동료 교사들은 그런 연옥을 놀라워했다. 그는 맞받아쳤다.

“우린 직원도 아니라매요? 회사랑 계약해서 수수료 받는 사업자라서 노동조합도 못 만든다매요? 그러면서 무슨 월요 모임이고!”

그러면서 그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위임 계약이나 도급 계약 촉탁직 사원 등이 되어 실제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전국 노동자 대회도 참석하고 비정규직 철폐 시위도 하고, 하루하루가 바쁘고 벅찼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부산 집행위원으로서 서울까지 쫓아가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회원이 조금씩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습지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자가용 없이 교재가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날 듯이 뛰어다녀야 했다. 어느 날은 너무 어지럽고 힘들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 있질 못하고 쪼그려 앉았다. 그러다가도 띵, 하고 문이 열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부터 확 바꾸고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안녕! OO야. 눈높이 선생님이야.”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잠깐의 만남이지만, 아니 그래서 더욱 그래야만 했다. 자신이 만나는 아이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조합 일도 많았고 연옥의 몸 상태도 그렇고 해서 당장 학습지 회사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런데 연옥이 근무하는 지점의 조합원은 달랑 두 명분이었다. 부산지역의 조합원이 전체적으로 늘었지만 지점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니 연옥은 차마 빠질 수가 없었다. 몸이 상해서 뇌하수체 종양을 키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학습지 교사를 그만두고 한 달 뒤,기어이 응급실에 실려가고 말았다. 수술을 세 차례나 하고도 한쪽 눈의 시력은 되돌릴 수 없었다.

우리마저 안 한다면

병원에서는 퇴원 후에도 1년은 쉬기를 권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자리가 보였다. 바로 민주노총 부산본부 비정규특위 간사 자리였다.

그 전에 일반노조 출신의 본부장이 경선에 임하면서 비정규특위를 만들겠다고 공약을 걸었었다. 연옥의 입장에서 일반노조 출신의 후보를 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학습지 교사가 비정규직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이니 비정규직 운동을 지지하는 건 당연했다.

비정규특위의 간사 자리는 공석인 상태였다. 맡을 사람은 연옥 뿐이었다. 겨우 다섯 달 정도만 쉬고, 한여름 8월부터 민주노총 부산본부 비정규특위 간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정규특위 간사로 일하면서 해양대, 부산대 청소용역과 경비노동자를 조직했고, 이듬해 여성연맹으로 들어가 부산지하철 청소용역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공노조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노총 부산본부 부본부장이 되어 비정규위원회를 다시 만들어 비정규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비정규 실천단을 꾸려 청소용역 노동자를 조직화했다. 신라대 청소노동자, 그 유명한 싸움의 시작이 거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신라대와 동의대 두 군데의 활동은 부산지역 전체 대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전까지는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했는데 여러 가지 처우가 약간 개선된 것이다. 각 대학의 사무처장들은 “일반노조가 들어오는 걸 막아야 한다.”면서 노조에 가입할까 봐 미리 수를 썼다. 설 추석 명절 선물이며 휴가비 같은 것도 챙기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기껏 피 터지게 싸웠더니 누구는 떡고물만 챙긴다고.

“노조 하면 윗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조합비도 내야 하는데, 노조 안 해도 회사가 알아서 이렇게 잘해주네? 이렇게 되는 거지. 근데 이렇게 하게 될 때까지, 동의대와 신라대 이 두 대학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얼마나 쌔빠지게 싸웠는지 잘 모르는 거죠.”

연옥은 그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힘주어 강조한다.

“여러분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이 다 독립운동 했나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 노동자의 삶이 조금 나아지는 거지 만약 아무도 안 하면, 우리마저 안 하면 다 같이 죽자는 거 아니겠어요?”

비정규 실천단 활동은 뿌듯하게 생각하는 활동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 투쟁해놓고는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들 때는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

누군가 물었다.

“투쟁과 해고가 있는 곳에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현장에 계속 있으면서 갈등과 상처가 없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포기 안 하고 이렇게 계속 살고 있는 거지요?”

빙긋 웃음 짓는 그의 답은 간결했다.

“달리 사는 법을 몰라서.”

앞으로도 지금과 별반 달라질 것은 없다.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 함께 연대하고 바꿔나가는 것.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의 사람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힘이 크다. 함께 하는 동지와 가족들, 그리고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같이 한 남편과 결혼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를 약속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2세를 낳지 않는다, 노선이 달라지면 갈라선다. 그러나 살다 보니 둘의 노선은 같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몬드라곤주의자였다. 인간의 이기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완벽한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기업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의 이상은 실패했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 남편이 말했다.

“천연옥, 늬는 참 빛나는 존재다. 네가 옳다.”

남편이 떠난 자리에는 함께 키우던 강아지 자인이가 남았다. 열네 살이나 되어서 요즘은 앞도 잘 못 보고 냄새도 잘 못 맡는다. 연로한 친정어머니와 자인이 때문이라도 부산을 떠나 멀리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활동을 좀 정리하고 한가해질 수 있다면 동지이자 친구였던 남편의 이야기를 소설로든 수필로든 남기고 싶다. 일단 부산일반노조 위원장 임기가 끝나면 시도해 볼 생각이다.

친정 식구들도 연옥을 변함없이 지지해준다. 학생운동 시절 어떤 여학생은 집에 붙잡혀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고 할 때도 연옥은 가족의 반대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처승인데 딸더러 ‘연옥보살’이라 부르곤 한다. 딸이 손사레를 치며 자신은 무신론자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 절대로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다.

“보살은 남이, 그러니까 모든 중생이 다 해탈하게 돕고 난 다음에야 자기도 해탈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데 네가 하는 일이 딱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딸의 마음자리가 관세음보살과 같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사상의 일치, 신념의 일치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동지가 있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사람들이 그렇다. 연옥이 생각하기에<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동지들 중에는 자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도 있다. 자기보다 더 힘든 조건에서도 그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자기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엄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4차 산업혁명으로 발달한 생산력의 성과를 소수의 자본가들이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실업 없이 더 적게 일하고, 더 편하게 일하고, 더 자기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사회에 복무하는 그런 세상은 올 것이다. 자기를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고 신념이 일치하는 동지가 있으니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연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연옥은 구호가 적힌 배너부터 앞으로 끌어 당겨 놓는다. 참으로 빛나,  선명하게 알려야 할 것은 자기 얼굴이 아니라는 듯이.


지금까지 해온 많은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보람된 활동이나 아쉬웠던 활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비정규 실천단’ 활동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전까지 민주노총에서의 조직은 상담소에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조직하는, 다시 말해서 앉아서 기다리는 조직화였어요. 하지만 비정규 실천단은 우리가 직접 뛰어들어 몸을 움직인 사례였고 실제 성과도 있었어요.

2012년 비정규 실천단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요, 녹산공단이나 대학 청소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었어요. 보통 4명 정도가 모여서, 일주일에 한두 번 부산에 있는 모든 대학을 다 다녔어요. 유인물을 만들어서 부산지역 대학 청소미화원 대기실을 돈 거지요. “노조를 만들자, 노조가 있어야 된다”고 말했어요. 부산지하철 청소용역노조 사례를 들면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좋아졌다고, 그러니 노조에 가입하자고 설득했죠. 그렇게 신라대, 동의대를 조직하고 그 사례를 가지고 또 다른 대학으로 가서 조직을 했어요. 그 사람들이 지금 부산지역 일반노조 대학지부고 일반노조의 주력이 된 거예요.

그렇게 부산지역을 전체적으로 돌다가 2017년 부경대가 노조에 가입하게 됐어요. 그때가 문재인 정권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이 나왔을 때예요. 부경대에서 60명이 한꺼번에 가입했으니 신라대 30명, 동의대 30명까지 합해서 엄청나게 큰 사업장이 됐죠. 일반노조 사업장이 보통 십여 명 정도니까요.

그런데 2018년도에 정규직 전환이 되면서 일주일 만에 노조를 탈퇴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민주노총에서 탈퇴한 국립대 노동조합으로 가버렸어요.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조건으로 정규직 전환이 됐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거죠. 일반노조의 부경대 담당자도 저였고, 교섭도 제가 갔고, 노·사·전문가협의회도 제가 했고, 간부 교육도, 조합원 교육도 제가 했는데, 정규직 전환 일주일 만에 탈퇴를 해버리다니…. 힘이 쫙 빠지더라고요. 일반노조 부위원장을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마침 임기가 끝나기도 해서 일반노조 부위원장을 그만뒀어요.

돌이켜보면 다 제가 조직 관리를 잘못한 거겠죠. 그쪽에서도 달콤하게 이야기를 했겠죠. 시간이 지나고 전해 들은 바로는, 노조를 통해 얻었던 것들이 다 예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직접고용이 되었다는 것뿐이지, 근로 조건은 예전 노조 없을 때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아쉬웠던 사례죠.

저는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정서라든지, 애로점을 잘 알고 있었어요. 대학 청소노동자들을 비교적 조직하기 쉬웠던 건 이 때문이에요. 지하철 청소용역노조 사무국장을 한 5년의 경험이 있었고 청소용역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통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뀔 수 있다는 대안과 확신을 줄 수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도 없이, 그냥 “노조 합시다” 했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이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걸 구체적으로 못 끄집어내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조금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 대상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고, 무엇이 가장 힘든지를 아는 겁니다. 그리고 노조가 만들어지면 어떻게 바뀔 수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주는 것도 중요하고요.

공단 조직사업은 또 달라요. 우리가 녹산공단 조직사업을 2011년부터 한 7년을 했는데, 유인물 부리고 권리수첩 나눠주고 실태조사하고…. 별짓 다 했는데 금속노조 녹산지역지회가 2019년에야 생겼어요. 그런데 이 지역은 엄청 문제가 복잡해요. 한 100명이 있는 공장이 있다고 쳐요. 5인 미만을 적용받으려고 여러 수십 개의 소사장제로 쪼개져 있는 거죠.

민주노총에서 그러더라고요. 이만큼 돈을 퍼부었으면 뭔가 성과가 나와야 하지 않나? 여기 말고 다른 데 투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비정규위원장이던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느그는 맨날 성과급 반대하면서, 왜 느그는 성과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데? 이건 노동운동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성과가 나면 더 좋지만, 안 나도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요.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고 봐요. 이게 꼭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야 성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조직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성과가 없는 게 아니라, 민주노총이 미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한 거잖아요. 양질전화의 법칙이 있는 건데, 아직 물이 끓을 때가 안 되었는데, 왜 물이 안 끓느냐고 하면…. 어쨌든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10주년을 맞은 부산지역사회연대기금 <만원의 연대>를 함께 만들고 키워오셨죠? <만원의 연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소개해주세요.

<만원의 연대>는 2013년에 생겼어요.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77일간 파업을 벌이다 공권력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한 후, 생계난과 여러 어려움으로 줄줄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었잖아요. 해고라는 게, 사업장에서 가장 열심히 투쟁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고되잖아요. 일터를 잃고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동자들이 힘든 상황을 버티려면 생계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몇십 명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2012년 말, 부산지역 활동가들이 모여서 해고자들이 죽지 않고 견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생계비라는 결론을 내렸고, 부산지역사회연대기금 ‘만원의 연대’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준비 기간을 거쳐 2013년 4월 29일 부산일보 강당에서 발족식을 열었는데,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신 김진숙님이 발족 기념 강연을 해주셨어요. 20개 단체 대표들이 제안자로 함께 해주셨고, 그중 7개 단체의 위원들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후원자 모집과 지원대상 선정 등 사업을 추진했어요.

당시 제가 해고노동자의 사정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실무운영위원을 맡았어요. 해고노동자들의 상황을 항상 살펴야 하니까 투쟁 사업장은 어디든지 가려고 했어요. 투쟁 사업장을 살펴보면서 지원이 필요한 대상자를 물색해서 그 동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지요. 그러다 보니 지역의 투쟁과 해고가 있는 곳에 항상 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2023년 <만원의 연대> 10주년을 맞아 지난 5월에는 10주년 행사를 열었어요. 처음에는 해고노동자의 생계비 지원에서 출발했지만, 장기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겪는 생계문제를 모른 척할 수 없어서 활동가 긴급지원이란 이름으로 필요한 경우를 따져서 지원했어요. 몸이 아픈데도 치료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에게 의료비 지원사업도 했고,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 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때는 택배 노동자들을 위한 모금사업도 진행했고요. 2023년 4월까지 생계비 지원을 121 회 했는데, 누적 지원액이 5억 6,010만 원이 됐어요. 의료비 지원도 활동가 8명에게 1,550만 원을 지원했고요. “가장 절박한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악수, 가장 외로운 이들과 나누어 먹는 따뜻한 밥”이 되고자 달려온 10년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함께 응원하는 나라도 있던데요. 한국은 정부의 반노동정책에 더해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시민들에게 불만과 욕설을 듣기도 합니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시민들이 지지를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조합 조직률은 낮아도 단체협약 적용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에요. 프랑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8%인데요,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인 14.2%보다 낮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은 98%에 달해요. 노동조합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이 거의 같은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지요. 프랑스 시민 대부분은 노동자들이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한 성과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거죠.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성숙한 시민의식도 있겠고, 한국처럼 노동조합 하면 빨갱이라는 프레임도 없을 테고요.

한국에서 노동조합의 투쟁과 파업이 전체 노동자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려면 제도적으로 산별교섭을 강화해서 단체협약 적용률을 높여야 합니다. 실제로도 노동조합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는 투쟁이 되어야겠죠. 예를 들면 최저임금인상 투쟁 같은 건 모든 노동자의 임금인상 투쟁이니까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을 위해 싸운 결과, 근로기준법이 전면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5인 미만 사업장에도 퇴직금이 생겼잖아요? 이런 것도 노동조합이 투쟁한 결과인데, 잘 모르고 욕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좀 더 설득력 있는 방식의 선전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봐요. ‘중·소·영세 ·비정규노동자의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도 마찬가지고요. 시민의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 가족이잖아요.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이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 노조는 꼭 필요한 조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올해는 어떤 활동에 가장 마음 쓰고 계세요?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의 조직 확대가 가장 중요한 현안이에요. 조합원이 자꾸 줄어들고 있어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라 정년퇴직으로 인한 자연 감소도 있고, 여러 이유로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중에 복수노조로 교섭권이 없는 사업장이 또 있고요.

그래서 올해 사업계획으로 조직사업을 위한 조합원 1인당 1만원 이상의 조직사업비 모금도 했고, 조직화 실천단을 꾸려서 5월부터는 주 1회 실천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제도라는 노동악법 때문에 교섭권이 없는 사업장이 10개가 넘어요. 이 사업장 노동자들은 노동3권이 아니라 노동1권만 있는거예요.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부정하는 거죠. 너무 안타까워서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제도 폐기를 위한 사업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조합원들의 계급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사업들도 진행하고 있어요. 제가 노조 교육위원장을 겸하고 있거든요. 투쟁사업으로는 민주노총 총파업을 위한 쟁의권 확보가 중요한데, 특히 최저임금인상 투쟁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최저임금투쟁이 모든 노동자의 임금인상 투쟁이니까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집중해야 하는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조합원들이 최저임금 당사자들이기도 하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본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첨예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요.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은 어쨌든 조직, 교육, 투쟁,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고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이어야 한다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중·소·영세·비정규노동자의 희망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은 2000년 4월 1일 결성되어 영세사업장과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해온 노동조합입니다. 민주노조 최초의 전국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정신(민주성, 자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성)을 계승하고 ‘인간답게 사는 길에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정신을 전국화하기 위해 2023년 7월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로 조직 형태를 변경하였습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141번길 13 노동복지회관 509호
전화번호: 051-637-7463
홈페이지: ilbannojo.org

3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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