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한아름 / 좀 괜찮은 사람

지금 파랑은

좀 괜찮은 사람

조금 더 나아지는

아름에게는 20대의 절반을 함께 한 공부 모임이 있었다.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면서 자신과 사회를 공부했다. 강단에 서거나 연구자가 되려는 공부가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그 모임이 흩어지고 정처 없던 때에 지인이 <이주민과 함께>를 알려주었다. 의미 있는 활동을 제대로 하는 곳에서, 배움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아름에게 거기를 한번 가보라고 했다.

“뭐라도 쓰임이 있는 곳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소모품처럼 다뤄지는 건 싫었거든요. 보육원에서 1년 정도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기관의 직원들과도 아이들과도 인간적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어요. 단절된 채 허드렛일만 하면서는 보람을 느끼기가 어려웠어요.”

아름에게는 처음 이주민 환자와 동행해 병원에 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리핀에서 온 그녀의 신분증에는 ‘제시카 고바야시(가명)’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형병원에서 몇 시간이나 진료를 기다리고, 검사를 거쳐 입원 절차를 진행하고, 건강보험이 없어 터무니없이 비싼 병원비를 어떻게 지불할 수 있을지 사무국과도 의논하고,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의료지원 요건을 두고 원무과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아름은 제시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이름의 내력은 이러했다. 이주노동자로 일본에 갔고, 일본인 남성과 결혼을 했고,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을 했고, 필리핀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오기까지의 긴 이야기였다.

“제시카는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몸이 아픈데도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어요. 조카들 학비를 보내야 한다며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낸 하루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을 듣게 된 거죠.”

아름은 놀라웠다. 자신의 작은 행동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뻤다. 자신이 한 일은 이주민 환자와 병원에 같이 가서, 의료 이용 절차를 안내하고 서툰 영어로나마 의료진과 의사소통을 도운 게 다였다. 그러면서 현장 상황을 단체와 공유했다. 아름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대단한 선의나 특별한 전문성을 발휘한 게 아니다. 미등록 이주민이 건강보험이 없어도 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받게 도운 것뿐이다.

“매직! 이런 느낌이었어요. 내가 개입한 현장에서 미등록이주민이 병원비 부담 없이 입원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으니까요. 제시카 씨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건강보험이 없어서, 병원비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렇게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는데 이렇게 치료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자 아름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길도 있구나. 필요한 정보와 자원을 연결해주는 단체 한 군데가 막막한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힘이 될 수 있구나. 곁이 되어주는 한 사람처럼.’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주민과 함께 병원에 가는 일을 하게 되었다. 딱히 직장에 매인 몸이 아니었던 터라 시간을 쓰기가 자유로웠다. <이주민과 함께>에 나가는 횟수가 점차 늘던 어느 날, 상근활동가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어요? 활동비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기쁜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고?’ 했다니까요.”

그렇게 의료팀장이라는 역할을 맡은 활동가가 되었다.

이어주고 엮어내고

아름에게 활동가란 곁이 되어주고자 하는 사람들의 귀한 마음을 엮어내는 사람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간과 품을 들이는 활동으로, 모금으로, 구체적 사업으로 이어 필요한 일을 도모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주민을 위한 통번역 시스템을 구축하는 큰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는 새내기라 겁도 났지만 신이 났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나중 문제였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무료 진료소는 의료진이 있지만 통역 지원까지는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이주민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터였다. 접수부터 진료, 복약 안내와 병원 연계까지 모든 과정에 환자의 상태와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안내해야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려웠다. 한국어가 좀 가능한 지인과 같이 오거나, 전화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의료 전문 용어를 통역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의료통역에 대해 배우고 훈련받은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증상과 염려를 길게 설명해도 통역은 한 마디로 끝난다거나, 하루 세 번 먹어야 할 약을 한 번에 세 알 먹으라고 전하는 일도 생겼다. 가벼운 1차 진료 현장이 이런데, 하물며 중대한 질병이나 응급수술처럼 생명에 직결되는 의료행위가 이뤄지는 병원에서 의료통역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게 너무나 분명했다.

하지만 환자와 동행한 통번역 활동가에게 ‘얼마 받고 일하는 거냐, 당신은 브로커냐’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사나 간호사조차 ‘보디랭귀지로 다 되는데 거창하게 무슨 의료통역씩이나’라든지 ‘진료시간 촉박하니 통역은 밖에 나가서 하라’는 경우도 있었다.

아름은 이런 상황에서 부산지역 이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익적 통번역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름에게는 물론 단체 차원에서도 큰 도전이었다.

프로젝트 첫해에는 서울과 일본의 이주민 의료 및 통번역 지원기관들을 탐방하며 배우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나가와현의 다언어정보센터 MIC 가나가와(Multi-language Information Center Kanagawa)를 방문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의료통역사는 병원의 준직원으로서 명찰을 착용하고 오역의 가능성에 대비한 보험에 가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의료통역을 필수의료행위로 인식하고, 의료기관이 환자와 통역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하는 것을 보고 활동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국내외 연수를 통해 이주민 통번역 시스템의 큰 그림을 그리는 한편, 부산 경남지역에서 이주민 진료소를 운영하는 단체들과 이주민건강네트워크라는 연대체를 결성해 우리 현실에 맞는 통번역 지원체계의 형식과 내용을 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부산대학교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실이 이주민 의료지원을 위한 협업을 적극적으로 제안해주었다. 미등록 이주민 건강실태조사를 시작으로 이주민 의료통역 가이드북 제작, 부산지역 의료 안전망 협의회 참여 등 많은 일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2년 차에 시작한 이주민 통번역 활동가 양성교육의 기획과 강사진 구성에도 큰 도움을 받았고, 나중에는 공공팀 직원 분들과 해외연수를 갈 정도로 신뢰 관계가 두터워졌으니 그야말로 든든한 파트너가 생긴 것이다.

프로젝트 종료 이후 시스템 유지 방안도 모색해야 했다. 어떻게든 공적 예산이 투입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의원을 먼저 만나보라는 조언을 듣고 시의회를 찾아갔다. 삼십 년을 부산시민으로 살면서 부산시 의원회관에 가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아름의 설명을 쭉 들은 의원의 첫 마디는 이랬다.

“왜 이제야 찾아왔어요?”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시의원은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이주민도 부산시민이다. 당사자가 직접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시민사회에서 좀 더 큰 목소리를 내줘야 시의회에서도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책정된 예산은 500만 원으로 매우 적었지만, 미등록 이주민을 위한 의료통역에 시예산을 편성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던 행정체계에 바늘구멍을 뚫어낸 것이다. 아무리 두텁고 견고한 벽이라도 구멍을 뚫었다면 앞으로 더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의정에 참여하는 민주시민 교육을 제대로 받은 기분이었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가의 행위목록 가운데 ‘거버넌스’라는 민관협력에 대해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꼭 필요한 일에 나의 역할이 있다는 것, 이럴 때 도리 없이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고, 함께 할 사람들을 조직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렇지만 기획할 땐 상상의 자유를, 진행할 땐 현실화의 기쁨을, 결과적으로는 성장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틀에 박힌 일을 지루해하는 아름에게는 오히려 신나는 일이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

3년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에 무리가 왔다. 통번역 활동가를 교육하고, 기관 의뢰를 받아 파견하고, 활동비를 지급하고, 시예산을 확보하는 것까지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그렇지만 시예산 500만 원으로 시스템을 계속 운영할 수는 없으니 돌파구가 필요한 때였다. 고민과 걱정에 머릿속 엔진이 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들 수 있는 밤들이 늘었다.

힘들면 그만 하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위로인 걸 알겠는데, ‘지역에 있는 일개 단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동안 애 많이 썼으니 너무 용쓰지 말라’는 동료의 말에 힘이 쭉 빠졌다. 함께 고민하고 애써줄 것으로 믿었는데 신뢰가 무너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동안 난 뭘 한 거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 왜 시작한 거지?’ 활동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사소한 갈등에도 예민해지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귀순 대표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다녀왔다. 거기서 오륙십 대 선배 활동가들을 만났다. 선배 집에서 자고, 사주는 밥 먹고, 활동하는 기관에 방문해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 중간 ‘힘들지?’ 하는 한 마디에 아름은 눈물을 찍어냈다. 아무도 그만두지 말라는 말은 안 했는데 눈물이 났다. 그렇게 바람 쐬고 와서는 2013년 6월에 <이주민통번역센터 링크>를 만들었다.

“‘링크’는 연결을 뜻하잖아요. 통역과 번역을 통해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이주민을 사회적 관계망으로 연결하고, 이주민 당사자인 통번역 활동가들이 동일한 언어권 이주민을 지원하는 호혜의 관계 속에서 이주민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언어문제로 생기는 불필요한 갈등이나 고립 문제를 해소해 한국 사회와 이주민을 연결하겠다는 포부를 담아 이름을 지었죠.”

아름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해온 파트너와 함께 아이를 맞이하며 일상과 삶의 도반이 되기로 약속한 것도 큰 행운이었다. 활동가 엄마, 예술가 아빠로 각자의 조건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매일매일의 기쁨과 슬픔을 오롯이 누리고 있다.

올해 일곱 살이 된 딸이 보기에 엄마는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는 사람이고, 아빠는 자기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늘 반겨주는 사람이다. 공연이나 연습이 있는 날만 빼고, 아빠는 작업실에서 음악을 만들고 자기를 챙겨주고 집을 돌본다.

어느 날인가 지금 아름이 일하는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의 사무실에 아이가 온 적이 있다.

“여기가 엄마 집이야?”

아이가 생각하기에 엄마에게는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의 원래 집과 따로, 또 다른 곳이 있다. 낮 시간을 보내는 엄마의 두 번째 집이 바로 여기였구나 싶었던 것이다.

아름은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당사자 곁의 활동가를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인 첫 번째 사람 곁에 선 두 번째 사람이 필요하듯, 두 번째 사람인 활동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파랑>과 같은 중간지원조직은 ‘세 번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대’란 그렇게 자리를 바꾸며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름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좋은 사람들 곁에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게 한다는 점이다. 그가 닮고 싶은 ‘좋은 사람’은 날카롭게 통찰하고 지혜롭게 돌파해내는 현명함, 모순과 패착에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는 넉넉함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활동가의 특전이 무엇인지 아세요? 좋은 사람을 늘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름은 파랑이 지키려는 다른 활동가들을 대하듯 자신을 바라보기로 한다. 천천히 오래 가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좀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말이다.


우연히 활동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후원이나 자원봉사에 그치지 않고 온전히 활동가로서 살겠다고 마음먹는 건 다른 차원일 것 같은데요. 혹시 ‘활동가’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제가 활동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활동가로 살게 된 계기에요. 활동의 동력을 묻는 질문에 천연옥 위원장님이 “달리 사는 방법을 몰라서”라고 답하셨는데, 제 경우는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라고 말할 수 있어요.

고통의 바로 곁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힘들게 보일 수는 있어요. 그런데 제게는 곁에 있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이 대단히 강렬한 것이었어요. 나의 어려운 상황, 내밀한 사정을 타인과 공유하고 도움을 청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더구나 저는 상담이나 복지의 전문가도 아니고, 개인으로서는 도움이 될 만한 자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데 ‘활동가’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아주 구체적인 삶의 한 장면을 목격하고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곁에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현장’에서의 경험이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활동가로서 이주민 당사자 곁에 초대받은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이주민의 곁에 있다가 지금은 활동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서 ‘세 번째 사람’으로 살아가고 계신데요. 자리를 옮기게 된 과정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활동가들이 돈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부산에도 인권재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동의했고, 그런 기반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선배 활동가가 계셔서 감사했어요. 저도 보탬이 되고 싶었죠. 마침 2018년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 활동을 계기로 이주민 인권을 넘어서 퀴어, 젠더, 장애 등 다양한 부문을 아우르는 보편적 인권운동에 관심이 높아져 동료 활동가들과 독서 모임을 꾸리고 있던 참이기도 해서 더욱 공감이 갔어요. 부산지역 인권운동을 넓게 아우르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활동가가 필요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는 않아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활동가의 역할이 바뀔 뿐이지요. 제가 활동을 배운 단체가 성장하고 진화해온 역사를 보면서, 필요에 따라 조직이 재구성되거나 단체가 없어질 수도 있지만, 조직의 변화나 단체의 존립이 운동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권’의 개념이 확장되고 해방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진보라면, 인권단체의 과제와 활동가의 역할 또한 나날이 갱신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저는 20대의 공부공동체 모임을 계기로 ‘개인’에서 ‘사회’로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어요. 그 뒤 <이주민과 함께> 활동을 통해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삶을 ‘국민의 자격’으로 재단하는 국민국가의 논리를 보편타당한 ‘인간의 권리’로 재구성하는 저항의 문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처럼 활동가도, 단체도, 운동 자체도 해방의 영역을 넓히며 스스로 갱신해가는 모습이 제게 와닿는 서사의 방식이에요.

지금 있는 자리인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소개를 좀 해주세요. 그리고 파랑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사실 ‘인권’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데 아쉽게도 시민들에게 ‘인권’은 조금 멀리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저는 우리 지역의 인권활동가의 존재를 잘 드러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 인권운동현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역에서 삶을 일구고 운동을 이어갈 다음세대를 위한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특히 파랑은 활동가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성장을 위한 교육, 교류를 위한 네트워크, 쉼을 위한 모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가들이 자주 만나는 거요. 서로의 활동과 고민을 나누면 혼자서 끙끙 앓는 대신 함께 모색하고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잖아요. 파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거든요. 사람을 지키지 않는 운동에는 사람이 남지 않고, 사람이 남지 않는 운동에는 미래가 없어요. 부산지역 인권운동이 넓어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인권활동가들과 인권단체들을 적절히 매개하고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싶어요. 지역의 인권현장을 지키고 버텨온 활동가들이 각자의 현장에 집중할 수 있고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활동가들과 작은 인권단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과 비어있는 구석들을 채워 나가고 싶어요. 그렇게 부산지역 활동가들의 든든한 ‘빽’이 되고 싶어요.

활동가의 곁에 있는 한아름과 한 아이의 곁에 있는 한아름이 동시에 있잖아요. 활동가와 엄마를 병행하며 겪는 어려움이 있을 텐데요. 여전히 힘들지만 버티고 있는 비법(?)을 엄마 활동가에게 여쭤보고 싶어요.

활동가인 엄마로서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기보다, 일하는 엄마들이 대체로 겪는 어려움을 저도 안고 있는 것 같아요.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고,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보러 달려가요. 종일 엄마와 떨어져 지낸 아이와 저녁을 먹고, 씻기고, 잠깐 놀다가 책을 읽어주면서 잠들기를 기다려요.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드는 날도 많고, 기운이 좀 남는 날은 밀린 집안일을 하고요.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 하루 24시간 중에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4시간 정도밖에 안 돼요. 저녁에 일정이 있거나 일이 밀려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얼굴을 못 보는 날도 있고요. “엄마, 야근 하지 마, 출장 가지 마” 하는 아이를 떼놓고 나올 때는 마음이 아프죠. 그래서 주말에는 되도록 신나게 놀아주려고 애를 써요. 바다에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요. 월요일에 출근하면 주말에 잘 쉬었냐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아이랑 노는 것도 쉬는 건 아니라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죠.

가장 힘든 시기는 제가 아플 때였어요. 출산 후 나빠진 건강 때문에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수술하고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마자 복직해 아픈 몸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했어요. 저도 아이도 파트너도 너무 힘들었죠. 2년 반 전에도 대만 국적의 홈리스 할머니를 모시고 노숙인 쉼터와 병원을 쫓아다닌 끝에 입원 절차를 마쳤는데, 바로 다음 날 제가 디스크 파열로 구급차에 실려 갔어요. 또 한 달을 입원해 치료를 받았죠. 저는 몸이 아팠지만 파트너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을 거예요. 그는 어린아이와 아픈 저를 같이 보살피느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가지 못해 많이 괴로워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녹초가 되어 집에 가면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해서 엄마로서 늘 미안하지요. 제가 바쁘고 아플 때마다 가사와 양육 부담이 늘어나서, 결국 자신의 일을 후순위로 두게 되는 파트너에게도 늘 고맙고도 미안하고요.

그런데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딱 끝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저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니까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저녁 일정은 최소한으로 참여하게 되고요. 퇴근 후에도 소통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제가 맡은 일조차 급한 의사결정을 위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동료들도 제 상황을 알고 있고 이해는 하지만 일이 자꾸 밀리면 당연히 힘이 들 수밖에 없잖아요. 당장 내년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제도적인 보육시간이 확 줄어들어요. 사교육으로 커버하기엔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고 결국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데, 제가 일을 못하는 만큼 동료들 일이 늘어날 걸 뻔히 아니까 또 미안한 상황이 되는거예요. 이건 대부분의 시민사회 단체들이 부족한 재원과 인력으로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죠. 최저임금 수준의 활동비로는 양육자로서 생활을 꾸리기가 쉽지 않고, 과중한 업무량과 초과근무로 과로와 소진이 일어나는 거죠. 게다가 안식월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여건이니까요.

활동가도 엄마도 돌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아프고 약한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고 챙겨야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 제가 활동하는 현장은 중간지원조직이라, 급박한 사안이 터지거나 당장 제가 달려가서 개입해야 하는 일들이 많지는 않아요. 활동가로서 일터와 엄마로서 삶터의 균형을 잘 맞추는 데 집중하면 돼요. 하지만 적대적인 갈등이 상존하는 투쟁현장이나 직접 지원이 필요한 분들께 긴급하게 개입해야 하는 현장의 활동가들은 어려움이 더 클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도 엄마로서도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이 있는데, 두 가지 다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가족과 동료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미안함이 쌓이다 보면 결국 어느 하나를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돼요. 그전에 활동가 자신에게 탈이 나거나요.

마지막으로 활동가로서 이루고픈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아이가 자라서 엄마가 되어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요. 마찬가지로 엄마인 저도 제가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요. 아이에게 좋은 엄마, 파트너에게 좋은 파트너, 동료들에게 좋은 동료가 되고 싶지만 저의 역량, 저의 한계가 곧 제가 가진 조건이니까 그것을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아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대의를 말하는 활동가로 살면서도, 운동을 배반하고 반역하는 자신의 모습 말이에요. 몸이 아파서, 서운한 마음에, 생활비가 쪼들려서 눈치를 보고 계산을 하다가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봐도, 그가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상황과 잘못된 선택으로 유혹받는 마음에 눈이 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제발 제게는 그런 시험이 주어지지 않기를, 유혹이 없기를 바라요. 원래 그런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누구라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시인 김수영을 좋아해요. 너무하다 싶을만치 자기비겁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투지와 자기모순을 꿰뚫어 보는 힘에 도리없이 이끌리다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당부에 기대기도 하고요.

파랑이 지키려는 다른 활동가들을 대하듯이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오래 가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마도 한동안은, 인권운동현장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활동가들이 좀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돕는 파랑의 활동가로, 인권운동을 자신의 몫으로 삼은 이들 곁에 잘 서 있어보려고요. 파랑의 슬로건처럼 여럿이 함께, 더 힘차게, 오래 멀리 가보고 싶어요.


사단법인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사단법인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은 ‘여럿이 함께, 더 힘차게, 오래 멀리 갈 수 있는 인권운동’을 위해 2022년 출범한 부산지역 인권운동 중간지원조직입니다. 파랑은 지속가능한 지역인권운동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인권활동가의 쉼과 성장을 돕고, 인권현장에 밀착한 연구와 공론장을 지원하며, 인권단체의 지속과 확장을 위한 지지기반 마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연제구 월드컵대로12, 4층
전화번호: 051-710-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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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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