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이현우 / 저랑 동행하실래요?

지금 파랑은

저랑 동행하실래요?

군인의 아들

이현우는 아들 네 형제 집안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고 남동생 셋은 모두 현직 군인이다. 가족 중 혼자만 다른 직업을 택한 셈이다.

군인 가족이었기 때문에 전국을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성남, 의정부, 서울, 광주, 춘천 그리고 부산…. 살았던 곳이 참 다양하다.

초등학교는 춘천에서 졸업했다. 춘천에서 졸업하기까지 다섯 번 정도, 거의 매년 전학을 간 셈이다. 중학교는 다행히 몇 번 안 옮겼다는데, 물어보니 세 번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낯선 곳에 가는 것을 크게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 군인 가족 자녀 특유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금세 친해졌다는 편이 맞다. 어린 현우는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이기적이고 강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릴 때 이야기다. 떠드는 아이 이름을 칠판에 다 적어버리고, 안 떠들면 지워 줄게 이러면서 막 권력을 휘둘렀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5학년 때 친구들이 똘똘 뭉쳐서 어린 현우를 닦아 세웠다. 그 일 이후 스스로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차츰 친구들과 함께 잘 어울려 놀게 되었다.

어린 시절 사진은 별로 없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의 시야각이 좁았다. 전맹까지는 아니고 사람 형체가 정확하게 안 보이는 정도이다. 책을 읽거나 하는 일상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남들이 볼 때 시선 처리가 달라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단체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경우 말이다. 졸업앨범이든 소풍 사진이든 사진사는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를 보라고 어린 현우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사진 촬영하는 게 힘들었다 심지어 선생님께 뺨을 맞고 안경이 깨진 기억도 있다. 다 큰 어른이 된 대학시절, 교수님도 그랬다. 너 왜 나를 안보냐, 지금 내 얘기 안 듣냐고 언짢아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일일이 잘 안 보인다고 해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장애가 무언가 인생의 선택을 할 때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장애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선택이 다 이것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살아가면서 자유, 그러니까 선택의 자유와 운신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무언가 본인 스스로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장남도 국가 공무원으로 일하길 원하셨다. 잠시 부모님과 갈등은 있었지만, 법학전문대학원에 합격했을 때는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광주와 고양이 달

고등학교와 대학은 부산 경남권에서 다녔고, 그 이후의 학업과 변호사로서 첫 실무는 광주에서 했다. 부산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임지였다. 그래서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다녔던 수영중학교 졸업생들 중에 충렬고로 배정받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번에도 낯선 곳에 툭, 떨어진 셈이었지만 그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니 집안의 압박이 심해졌다. “네 성격이나 우리 가족 스타일로 봐서 공무원이 딱이다, 얼른 공무원 시험이라도 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공무원이 되는 순간, 그 길에 엄청 충실할 것이다.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다른 걸 선택할 수 있는,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고민하다가 법학전문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다.

법전원을 준비하던 네 명의 친구들과 나름대로 작전 비슷한 걸 짰다. 아무래도 한 학교에서 넷을 모두 뽑아줄 것 같진 않으니 서로 흩어져서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교의 법학과 졸업생 명단을 보면 충남대, 동아대, 전북대, 제주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있다.

그는 1순위도 전남대, 차순위도 전남대를 지원했다. 그 까닭은 ‘인권’을 특성화로 내세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전국을 돈 것 같지만 광주를 비롯한 전남 쪽은 안 가봐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때마침 군인인 동생이 광주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할 예정이었다. 이래저래 광주가 그를 불렀다.

광주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그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한국 사회 내에서 차별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공익 변호사 활동을 하는 분이 광주에 있었다. 예비 변호사 현우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많은 것을 곁에서 보며 배울 수 있었다.

법전원을 졸업할 즈음,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이라는 단체에 구인 공고가 떴다. 공고를 보자마자 그는 바로 지원했다. 그전부터 동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관심 있게 지켜보던 참이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소수자에 관심이 많은 그가 동행에 지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해 1월에 채용되어 실무 실습에 들어갔다.

민변에서 신입 회원이라며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다. “이현우에게 동행이란?”이라는 질문에 그의 답은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가는 것,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였으니까.

광주의 동행에서 1년 정도 일했는데, 현우에게 동행은 ‘공익변호사로서의 기초 교육장이 되었던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공변 양성소, 공변 실습소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처음으로 실무 실습을 했던 곳이라 의미가 더 깊다.

그에게 광주의 기억은 무척이나 좋다. 반려묘 ‘달’을 만난 것도 광주 법학전문대학원 1학년 때였다. 달은 광주를 떠나 부산에 자리 잡은 지금까지 줄곧 그와 함께 살고 있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달은 그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다.

2018년 11월에 광주를 떠나 부산으로 왔다. 개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공익 변호 활동을 해보자. 이게 씨앗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동행의 지부가 되었든 벤치마킹이 되었든, 그의 변호사 개업 출발점은 이것이다.

동행한다는 것

이현우 변호사 사무실은 2019년 1월에 개업하였다. 준비 기간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그는 법원에서 가까운 중심 상가보다 좀 떨어져 있더라도 임대료가 싼 곳에 사무실을 얻었다. 조그만 건물의 비좁은 사무실은 실내에 있어도 바깥의 한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전략은 ‘오래 가자’는 것이었다. 직원 없이 변호사 혼자서, 운영비를 최소화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오래 잘하자는 것이다.

개업 후 첫 번째 업무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여러 단체에 전화를 돌리는 일이었다. 이주민단체, 장애인단체…. 사건을 맡아도 돈이 될 리 없는 곳만 골라서 걸었다. 상대방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철벽을 치는 게 느껴졌다. “누구라고요? 뭘 하고 싶다고요?”라는 반응이 가장 먼저 나왔다.

한동안은 이주 장애 관련 공익변호 활동 외에 소소한 사건을 담당하기도 했다. 직업인으로서의 변호사 일이 활동가로서의 삶을 보조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현재는 동천 펠로우 덕에 경제적 고민이 줄었다.

동천 펠로우는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공익활동위원회 소속 변호사들이 매달 기부해서 조성하는 기금이다. 이 사업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공익변호사의 활동을 전국 각지로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지역에서 공익변호활동 중이거나 하고 싶어 하는 변호사에게 2년간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자문 및 교육을 해준다.

2023년 11월까지 지원을 받는 그는 내심 고민이 많았다. 십시일반 모은 것임을 알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내가 하는 활동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크게 보도될 만한가? 그래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야 하지 않나? 이런 지원을 받으면 눈에 확 띄는 성과를 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장애인 당사자, 미성년 피해 당사자, 이주민 당사자 등 소수자 개개인의 권리 구제 위주의 소소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뭔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겼다.

이런 고민을 주변 변호사에게 내비쳤더니 그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이 사건 저 사건, 이렇게 저렇게 다 하지 않았냐”고 했다. 워낙 새로운 사건이 밀려들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일깨워주니 힘이 되었다.

동천 지원금을 받고 나서는 공익변호에만 집중해도 사무실 운영이 되어 다행이다. 지원금이 종료되는 앞으로도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운영비가 많이 들지 않도록 세팅해놨기 때문에, ‘오래’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주노동자분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상담하려면 주말을 이용해야 한다. 장애인분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일정에 맞추는 게 아니라, 당사자의 일정에 맞춰야 한다.

또한 공익변호사는 직접 조사를 하거나 의뢰인과 함께 가야 할 때가 있다. 보통 변호사라면 소송대리인으로서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할 것이다. 무엇무엇을 가져오세요, 이렇게 하면 사무실에 앉아서 다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12세 정도의 지적 수준을 지닌 발달장애인이 휴대전화 사기를 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거의 모든 일상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서류 발급부터 쉽지 않을 수 있다. 대리점에 가서 계약서를 출력해달라는 것도 변호사가 같이 가거나 해야 한다.

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면 보통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판결문 받아오세요”라고. 그런데 판결문을 떼는 것 자체가 높은 문턱이 된다. 우편으로도 뗄 수 있는 판결문을 장애인 당사자는 해당 법원에 방문해서 떼야 한다. 그럴 때 그는 함께 가서 변호사라는 신분을 밝히고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주민도 마찬가지다. 출입국관리소에 가면 일단 위압감부터 든다. 서류에 연락처를 적으라고 하는데 연락처라는 글을 못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못 적으면 서류 미비라고, 그대로 반려시키면 끝이다.

한번은 미등록 체류 아동 건이었다. 그가 서류를 다 챙겨서 “이거 들고 가서 그대로 신청하면 됩니다”라고 했는데, 뭐 하나가 빠졌다고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한 달 전에 예약해서, 어렵게 어렵게 출입국관리소까지 가서, 2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차례가 되었는데, “다음 분!” 하고 끝나버리다니 맥이 빠질 노릇이다.

얼마 전 다른 사건 하나는 담당 공무원이 다섯 번이나 접수를 안 받으려 했다. 속된 말로 튕김을 당한 것이다. 그는 당사자 분과 몇 월 며칠 만나서 같이 가자 약속하고 서류를 다 챙겨갔다. 담당자가 “이거 안 되는 것 같은데요” 하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근데 이게 아닌데” 하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해야 했다. 변호사라는 걸 밝히니까 그제야 “네” 하더라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이주민의 경우 소송의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함께 가주는 것, 그것도 공익변호사에게는 중요한 업무이다. 말 그대로 ‘동행’이다.

보통 직업인으로서 소송행위를 대리하는 자는 의뢰인에게 당신의 이익을 위한 법률적 주장을 하기 위한 증거를 모아오라고 한다. 그러나 공익변호사 이현우는 사실 관계를 알아보고 증거 자료를 찾기 위해 발로 뛰어야 한다. 난처한 상황의 당사자를 직접 만나러 다녀야 한다. 활동가로서의 변호인의 모습은 이것이다.

재판 일정, 강의와 교육, 연대 회의, 상담 등 일정이 자꾸 빽빽하게 채워지고 몇 년을 끌어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전으로 가는 사건도 많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소화하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 다른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던데요.”

직업이 변호사인 활동가 이현우는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화나는 일들이 중층적으로 쌓여 있고 다 해결되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한 파트 한 파트 이기고 끝내고, 또 이기고 끝내고 그러면서 이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당장 이기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돌 던지기 하듯, 길게 오래 동행하면서 말이다.


부산지역 1호 공익변호사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공익변호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보다 앞서 부산YMCA에서 활동하신 공익변호사님이 계시고요, 그동안 부산에서 공익변호 활동을 해온 많은 분이 계시기 때문에 부산지역 1호 공익변호사라는 호칭은 과분하고요.

공익변호 활동을 시작한 거창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찾자면 제가 오른쪽 눈이 불편하거든요. 어려서부터 놀림도 당하고, 차별받은 경험이 있다 보니 장애 인권 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광주에서 로스쿨 졸업하고<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에서 실무 실습을 하면서 활동을 통해 배운 경험들이 좀 더 직접적인 계기인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이주민 관련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동행에서 이소아 변호사님을 통해 이주노동자 체불임금 사건, 난민 사건들을 맡게 되면서 우리 사회 소수자로서 이주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감수성도 생긴 거죠. 알고 보니 일상적인 혐오와 차별, 권리와 권익에 대한 침해가 너무 심한 거예요. 외국인이니까 최저임금 안 줘도 되고, 산재 처리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당연시되는 거죠. 이주노동자들은 떠날 사람이니까 자국민인 고용주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문제의식이 커졌어요.

배영근 변호사님과 환경 분쟁 지역을 다니면서 얻은 경험도 커요. 화력발전소 문제, 광산 문제 등 전국의 환경피해 대응 활동을 하는 분인데, 운전부터 시작해서 재판 출석까지 모두 직접 하는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공익변호 활동하려면 체력부터 길러야겠구나’ 싶었죠.

실무 실습 마치고 많은 변호사를 찾아다녔어요. 전국 각지에서 공익활동을 하는 분은 물론 일반 사건을 하는 사선 변호사들께도 이것저것 많이 여쭤봤어요. 그러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맨땅에 헤딩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오히려 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그래서 연고가 있는 부산으로 와서 바로 개업을 했어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미군 세균 실험 대응 TF 활동으로 모범모임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민변 부산지부의 보물’로 통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많이 민망합니다. 민변 회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제목을 그렇게 뽑아서…. 2019년에 부산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민변에서도 연차가 낮은 막내로 간사도 맡고 여러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좋게 봐주시는 것 같은데요. 제게 민변은 ‘만나서 배울 수 있는, 보면서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공익활동에 전념하는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이 계시니까요.

부산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하면 가장 먼저 연락하는 곳이 민변이고, 변호사가 동석해서 대응하곤 해요. 부산 민변 소위원회 중 하나로 젠더위원회가 있는데, 함께 활동해온 선배들을 이어 이제는 제 차례라는 느낌으로 위원장을 맡고 있어요. 코로나 전에는 해운대구청이 부산퀴어문화축제의 개최를 불허해서 법적 대응을 함께 논의하고 스터디도 함께 하면서, 구청을 상대로 소송도 하고 인권침해감시단을 꾸려 활동했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이런 흐름이 다소 끊기긴 했지만, 공공기관의 성폭력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자리에 나서자고 서로 독려하고 계속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민변 활동을 통해 연결된 시민사회단체나 활동가들로부터 요청을 받기도 하는데요. 미군 세균 실험 대응 TF 활동이 그런 경우였어요. 감염병예방법이나 생화학무기법의 조항들을 근거로 고소 고발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실험실을 폐쇄하자는 조치도 취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두 답보상태이긴 해요. 미군 기지에 대한 것은 주민 자치 사무가 아니라 국가 사무여서 투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법리로 주민투표는 대법원에서 패소했거든요. 그래도 그런 활동을 통해서 최소한 지역사회 내에서 미군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나 싶고요, 항상 주민들이 주시하고 있고 감시하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는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사건 폴더만 40개가 넘던데요. 민변 활동에, 밀려드는 공익사건과 또 성격 다른 일반사건 수십 건을 같이 진행하시는 거잖아요. 소송까지는 안 가도 법률상담도 있을 테고, 회의나 강의도 많으시잖아요.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해내세요?

어떻게 하냐면요, 그냥 하게 돼요. 케이스 마스터라고 소송진행 과정을 주기적으로 알려주는 앱이 있어요. 기일 순서대로 쪽 나열이 되어 있고, 누가 뭘 냈다, 너 이거 해야 한다, 언제 재판 가야 한다, 이렇게 알림이 계속 뜨는데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스트레스가 커요. (웃음)

시민사회단체에서 오는 연락도 정말 다양한데요. 주기적으로 전화가 오는 곳은 장애인권익옹호기관, 시각장애인복지관, 희망웅상,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 지구인의정류장,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등에서 한 달에 한두 건씩 전화문의를 주시고요. 급한 사건들도 생겨요. 이주민이 갑자기 잡혀들어갔다, 그러면 급하게 맡는 사건이 생기는 거고. 여러 회의도 있어요. 장애인차별금지연대회의, 장애인권익옹호기관 학대심판회의, 이주사례연구모임 회의,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 회의, 청소년법률지원 온 마을 Lawyer 회의, 민변 회의, 일정이 겹치면 다 가지는 못하고 있고, 사이사이에 강의 요청도 있고요.

그런데 바쁜 일정과 상관없이 공익사건은 사건 하나하나마다 제대로 준비할 수밖에 없어요. 일반적인 민사 손해 사건이라면, 만약 제가 충분치 않아서 진대도, 실제로 그렇게 일을 하진 않지만, ‘에라, 내가 돈 물어주고 말지’ 하는 마음이 잠깐 스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공익사건은 안 그렇거든요. 장애인 학대 사건, 난민 사건… 이런 사건들을 맡다 보면 ‘이거 절대 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부담감이 사건 하나하나에 다 새겨져 있어서 기억이 안 날 수가 없고,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공익변호사로 살아간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요. 부산에서 공익변호사 그룹이 튼튼하게 뿌리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공익변호사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 활동비와 사무실 유지비를 형사사건 국선변호와 소송구조사건 변호의 보수로 마련하며 활동을 이어왔는데요. 처음에는 담당한 공익사건이 적어서 사무실 유지와 활동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점점 공익사건들이 쌓여가고 형사 국선변호 사건들도 많이 배당되면서 공익활동에 전념할 수가 없었어요. 사건에 치여 허덕이던 중에 재단법인 동천의 지역 공익변호사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2022년부터는 동천 지원금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서울에 비해 지원체계나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례로 노숙인 인권침해 사건이라면, 저와 이주언 변호사님 둘이서 대응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부산이면 좀 나은 편 아닌가 싶다가도, 부산의 변호사들이 일당백 수준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들어요. 개인적으로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분야는 장애 인권인데, 다양한 분야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생기죠.

그래서 소수의 공익전업 변호사가 모든 인권⋅공익 사건을 전담하기보다는, 공익사건에 관심이 많은 변호사들이 공익변호사 지원체계 내에서 상담과 소송을 담당하는 방식이면 좋겠어요. 시민사회단체나 활동가들이 변호사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하여도 고민이 필요할 것 같고요.

‘직업이 변호사인 활동가이고 싶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활동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저는 직업이 변호사인 활동가이기를 바라요.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지만 활동가들의 목표는 이 사회를 더 낫게 바꾸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활동이 법 제도의 변혁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 제도의 변혁이라는 말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변호사로서 의미 있는 판례를 만드는 것도 사회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판결로 어떤 결정을 이끌어내면 그 판결이 다음 판결을 위한 선례가 되는데, 이런 판례는 판결을 내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게 다뤄지거든요.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그걸 바꾸지 않으면 계속 유사한 판례들이 생길 테니까 새로운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이 서명을 못 한다고 은행에서 금융서비스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어요. 통장을 만들거나 대출을 못 하도록요. 대출의 의미도, 돈을 빌린다는 사실도 다 아시고, 소득도 있고 자격도 다 되는데 대출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저 손 근육이 경직되어 서명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분이었던 거죠. 성인이 자기 서명을 스스로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본인이 스스로 도장을 못 찍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차별하는 거죠. 그래서 부산에서 함께 활동하는 공익변호사들이 그 소송을 대리했고, 이겼어요. 선례를 만든 거죠. 이제는 그런 일을 겪은 분이 손해배상 소송을 하면 은행이 지는 거죠. 이제는 은행들이 장애인 상대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네, 이러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는구나, 생각하고 안 그러거든요. 손해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일단 미디어나 언론에서 소개하는 변호사의 업무와는 조금 다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의뢰인이 변호사 사무실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가 의뢰인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소송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 이전 신청단계에서부터 행정기관과 의견 조율까지 해야 하고요. 현재 다양한 직역과 지역에서 공익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단순히 공익⋅인권과 관련된 사건을 맡는 것만이 아니라, 소송 외에 신청 입법 제도개선과 같이 사회적 약자에게 불합리하게 구성되어 있는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도 공익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치지 않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직업이 변호사인 후배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제 역할도 있겠고요. 그래서 여러 트랙의 사회운동의 연대를 통해 지역사회와 제도가 변화하는 것을 함께 목격하고 싶어요.


법률사무소 동행 (변호사 이현우 법률사무소)

법률사무소 동행(변호사 이현우 법률사무소)은 1인 변호사 사무실로 부산지역 공익인권 사건을 중심으로 변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 이주,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연대하여 인권침해 사건을 대응하고, 지역사회에 공익인권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 조력을 제공합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연제구 법원북로 79-2, 희망빌딩 2층
전화번호: 051-920-9310

5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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