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또뚜야 / 머리가 아닌 몸으로

지금 파랑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해적의 말

미얀마 옛이야기 중에 앵무새 두 마리 이야기가 있다. 두 마리는 한 어미에게서 난 형제였다. 날개에 힘이 돋자 그들은 둥지를 떠났다. 한 마리는 스님이 계신 절에 도착했고, 한 마리는 해적이 사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절에 간 앵무새는 부처님의 말씀을 배웠다. 해적의 소굴에 간 새는 욕설을 배웠다.

또뚜야는 형이 먼저 와있던 한국행을 택했다. 그가 도착한 한국의 공장은 욕설과 차별의 말이 가득했다.

“<이주민과 함께>를 만나서 저는 해적의 앵무새가 아니라, 스님 곁의 새가 된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돈을 벌러 온 사람이었는데, <이주민과 함께>의 선배 활동가를 보면서 따라한 거였죠.”

현재 또뚜야는 <부산외국인주민지원센터>의 상담원이자 황금빛살공동체의 고문이다.

또뚜야는 우연한 기회에 <이주민과 함께>를 알게 되어 2005년부터 한국어 교실에 나갔다. 그곳에서 자신을 “또뚜야 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존중의 언어였다.

한국어 교실에 나가면서 차츰 한국말 실력이 늘던 어느날이었다. 유학생 비자를 가지고 이주노동을 하던 사람이 퇴직금을 떼일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또뚜야는 노동법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받을 수 있다고, 분명 이긴다고 그를 설득해서 사장을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또뚜야는 그 장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멀리서 한국인 활동가가 들어가는 걸 보며 숨어 있어야 했다.

“사장이 불법체류로 신고할까 봐 멀찌감치 숨어 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나 잘할 수 있는데, 그 사장한테 직접 말하고 법도 설명할 수 있는데 할 수 없었어요. 그때 제가 젊었잖아요. 그래서 더 속상했어요.”

혈기왕성한 청년의 가슴 속에 강렬한 꿈이 자랐다. 층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애가 탔다. 난 할 거야! 할 수 있어. 이런 마음이 자꾸만 커졌다. 그때를 또뚜야는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다.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울 때는 뒤에서 누군가 잡아주어야 마음이 놓인다. 넘어질까 봐 불안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자전거 타기에 재미가 붙으면 나중에는 혼자 타고 싶어지는 법이다.

“겁은 나지만 뒤에 대고 외치는 거죠. 이제 놔! 놔줘.”

형이든 친구든 듬직하게 나를 잡아주던 사람이 이제는 뒤로 빠져주길 원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또뚜야의 마음이 그랬다. 사전 상담을 하는 통역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사업주와 면담하고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졌다.

“이주민아카데미에서 노동법을 알게 되어서 그랬던 거죠.”

지금은 원하던 대로〈부산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노동 상담 등을 맡아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활동의 양상도 단계가 있는 건가 싶다. 초창기에 또뚜야는 사장에게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내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면 상대 쪽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사업주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객관적 사실을 짚어준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듯이 부드럽게 말하면 상대방에게서 “아, 그런 게 있는지 몰랐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또뚜야는 말한다.

“사장이랑 싸우면 내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싸울 필요 없이, 그냥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알게 만드는 거죠. 월급 안 주는 건 자기 잘못인 거니까요.”

또뚜야는 가능하면 정중하게, 그러니까 말을 예쁘게 하면서 일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사업주들과 치열하게 맞서야 할 때는 예쁜 말보다는 힘 있는 말이 필요하다.

<이주민과 함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단속이 두려워 피해 다니는 미등록체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그대로 달아난 일이다. 잔업을 마치고 너무나 배가 고픈 상황이었는데, 그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경찰차 소리에도 놀라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러나 초라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은 활동의 에너지가 되었다. 인권 침해를 당하고도 인식하기는커녕 사업주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동료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던 자신이었다. 누군가 열정적인 인권 활동가로서 지치지 않는 비결이 뭔지 묻기에 이렇게 답했다. “너무 당해서 그래요.”

한국에 와서 많은 인권 침해를 당했던 기억과 분노를 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시켰다. 씨앗이 잘 자라려면 햇빛과 물과 공기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만 자기 안의 좋은 본성, 다시 말해 씨앗이 가진 근원적인 본성을 져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국으로 날아온 새도 마찬가지다. 본인 스스로 ‘나는 해적의 말을 쓰기보다는 스님의 말을 배울 거야’라는 굳은 의지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을 잊지 않고,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인정할 만한 가치를 추구하는 에너지가 생긴다.

차별은 벗어두고

2007년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앞장서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샤프란 혁명이 일어났고, 또뚜야는 부산역에서 스님들을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미얀마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빛살공동체의 시작이었다.

현재는 <부산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다 보니 황금빛살공동체에는 매일 갈 수가 없다. 하지만 고문으로서 동생들의 의견을 듣거나 조언을 하는 등 늘 마음을 쓰고 있다. 황금빛살공동체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의 쉼터이자 도서관이자 자조 모임으로서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다.

황금빛살공동체 도서관 입구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려면 신발만 놓고 와서는 안 된다.

– 종교 차별, 민족 차별은 신발이랑 같이 벗어 놓고 들어 오시오.

처음부터 이런 문구가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미얀마는 불교국가다.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당연했다. 그런데 노조활동을 하지 말라거나 한국에서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이런저런 실천들을 못마땅해 하는 스님도 계셨다. 미얀마 친구들은 스님의 말씀에 의구심을 가지거나 대놓고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뚜야 생각은 달랐다.

“가사 장삼만 걸친다고 다 스님이 아니에요. 이걸 10년, 15년 전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친구들이 이제야 이해하는 것 같아요.”

버마족이든 카렌족이든 라카잉족이든 혹은 로힝야족이든, 불교도이건 힌두교도이건 혹은 무교이건 황금빛살공동체에서는 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함께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의 친구들은 한국으로 오기 전 경력이 다 다르다. 학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주노동을 목적으로 왔지만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한국어시험에 합격해서 온 사람부터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변호사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다. 알고 보니 의사인 사람도 있었다. 그는 한 1년 정도 바짝 벌어서 고국으로 돌아가 약국을 열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왔다.

또뚜야는 안타까웠다. 미얀마의 상황이 좋았더라면 그는 의료활동을 했을 텐데, 무엇하러 이 먼 곳까지 와서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해야 하는 걸까. 알다시피 이주노동자의 일이라는 게 사장님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복종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다. 학력이든 경력이든 다 소용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그저 일하는 기계로, 욕설에 익숙해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해적의 소굴에 간 앵무새처럼 말이다.

법적으로 맞지 않는 일에도 항의하지 못하고 “왜 반말하세요?”라고 되받아치지도 못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에 온 지 1, 2년만 지나면 처음 봤던 표정과 너무나 다르게 사람이 변해버린다. 차별받는 이주노동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신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잊는다.

황금빛살공동체는 스스로를 교육하였다. 노동법을 공부하고 무엇이 나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도 알아나갔다. 이 공동체 공간을 통해 대화하고 책을 읽고 음식을 나누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차 한 잔 마시고, 오랜만에 미얀마 말로 실컷 이야기나 나누다 갈 수 있다. 그러다 만 원, 2만 원…. 후원금을 내놓기 시작한다. 홈페이지에 자기 명단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내역을 알게 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함께해나갈지 의논하다 보면 삶의 태도가 변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는 더이상 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미얀마의 미래를 위한 장학사업을 하는 후원자들이다. 장학금을 줄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영상 인터뷰를 하고 심사도 함께 한다. 이 돈이 누구에게 가야 가장 가치 있게 쓰일까 고민하는 순간, 그는 단순한 공장 일꾼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또뚜야는 그 자리가, 그러니까 황금빛살공동체와 거기 모이는 친구들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의무다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담하면 입 아프죠. 그건 몸이 아픈 거예요. 정신적으로는 전혀 지칠 수 없어요.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왜 지쳐요?”

예를 들어 감옥에 투옥되었다면 어떻게 인권 활동을 한다는 말인가? 자기는 감옥에 끌려갈 염려가 없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편하게 지내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한다는 말인가?

최근 들어 황금빛살공동체의 후원금이 약간 줄어들었다. 연말이 되어 많은 사람이 고국으로 송금하는 액수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부독재를 향한 미얀마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중에는 미얀마로 매월 50만 원, 심지어 백만 원 넘게 보내는 사람이 있다. 한국의 물가를 생각할 때 그는 정말로 딱 굶지 않고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모두 보내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것은 분노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 나라에서, 전혀 목숨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지내며 겨우 부산역 광장에서 구호밖에 외치지 못하는데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가까운 고향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을 때, 그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만약 미얀마에 있었더라면 온몸을 바쳐 싸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한다. 그러니 여기서 열심히 돈을 벌어 보내는 일, 그것은 후방군으로서 해야 할 의무다. 그 친구는 스스로를 후방군으로 임명했다. 당장이라도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위해 고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매주 부산역에서 미얀마 상황을 전하며 한국과 세계 시민사회에 호소하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시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간절한 것은 아닌가 보다.

또뚜야는 안일하게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타깝다. 한국에는 미얀마에서 온 정치 관련 난민신청자가 많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난민 인정을 받았다. 한때는 아응산 수치 곁에서 군부독재를 없애고자 싸웠던 사람들이 지금은 나서질 않으니 씀쓸하다. 어떻게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몸을 사리는 거지? 그들 중 몇은 한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고국에서와 같은 생명의 위협이나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자유롭다. 오직 자신과 가족을 위해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는 게 문제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또뚜야가 연락을 하면 그들은 “바빠요.”, “미안해요.” 한다.

또뚜야는 우스갯소리로 왜 영화 같은 장면은 없는 거냐고 말한다. 과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동지들이 목숨을 잃고 조직이 와해되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숨어 지낸다. 그렇게 한낱 농부처럼 지내다가도 “때가 되었다!”라는 전갈이 오면 그는 분연히 일어선다. 오두막 한쪽 구석에 깊이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든가 뭐 이런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장면 말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또뚜야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맛을 본 사람은 다시 과거의 독재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답게 대접받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노예로 되돌아갈수 없다.

또뚜야는 말한다. “혁명을 머리로 하나요? 몸으로 하는 거지.” 요구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잊어서 안 될 것은 절대 잊지 말자.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모두가 인간답게 존중받는 세상을 위한 헌신, 이것이 나의 의무다.


2021 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가 있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항쟁이 2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처음엔 ‘가짜뉴스’라고 생각했어요. 은지은로 세계 곳곳의 현지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에게 연락을 받고 실제 상황이란 걸 깨달았죠. 또다시 민주화투쟁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자, 비록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미얀마에 가 있었어요. 부산역 앞에서, 서면 번화가에서, 사상구 길거리에서 1 인 시위를 하며 미안마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미얀마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 거리시위에 참여하며 찍은 동영상을 보내줘요. 통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상 조심하라고, 나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해요. 하지만 군부가 시위 참가자를 집에서 체포해 다음 날 시신으로 보내는 상황이기 때문에 걱정이 많이 돼요. 여전히 피를 흘려야만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요.

미얀마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을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전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40대는 1988년 항쟁과1) 2007년 샤프란 혁명2)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실패의 기억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승리하자고 다짐하면서도 그게 될까, 과연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어요.

1) 8888민중항쟁은 1988년 8월 8일 미안마 수도 양곤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군부 민중항쟁이다.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으나, 국가평화발전위원회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새로운 군부의 진압으로 시민, 대학생, 승려 등을 포함 수천 명이 희생됐다.
2) 샤프란 혁명은, 2007년 8월 15일 미얀마 군부의 일방적인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촉발되어 군부에 의해 강제진압 당한 9월 29일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반정부시위를 말한다.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미안마인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승려들도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고, 이때 승려들이 입은 가사의 색이 샤프란(saffron)을 닮아 ‘샤프란 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래도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봐요. 10대 후반과 20대인 노동자, 고등학생, 대학생들인 Y세대, Z세대는 군사 쿠데타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겠다는 믿음이 굉장히 강해요. 이들은 군부가 차단한 인터넷을 뚫는 기술적 방법으로 요지요를 통해 미안마 투쟁 상황과 소식을 널리 전파하고 있죠.

솔직히 말하면 저도 겁이 나요. 내가 죽으면 무엇이 변할까, 변화가 일어날까, 스스로 핑계를 찾기도 해요. 이럴수록 저는 ‘민주주의 혁명은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들은 운이 좋아요.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 <광주에서 만나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프로그램으로 광주에 다녀오셨죠? 어떠셨어요?

광주는 십여 년 전에도 다녀왔어요. 그리고 2023년 6월 4일 부산김해 지역 미얀마공동체 멤버들, <미얀마민주항쟁연대 부산 네트워크>  분들과 또다시 광주를 가게 된 건데요. 옛 전남도청 앞에서 104차 캠페인을 진행하고, 5-18 민주광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한국어와 미얀마어로 함께 부르고, 민주 묘역에 참배 드리면서 답사를 마무리했어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답사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참았던 눈물을 흘린 친구들도 있었어요. 함께 나눈 이야기 중에 ‘우리가 미얀마 군부독재의 마지막 세대가 되겠다’는 다짐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걸 꼭 기억하겠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아있어요.

광주 답사를 통해 더 강하고 밝아진 동지들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미얀마 사람들은 이미 많은 생명과 피를 바쳐왔지만, 광주의 역사에서도 그렇듯이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요. 동지들은 이전보다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에 충실히 함께할 겁니다.

2007년 샤프란 혁명 당시 스님들을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황금빛살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동안 공동체가 해온 일들과 함께 공동체 소개를 부탁드려요.

그 당시 미얀마공동체는 경기도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다들 공동체 활동이 뭔지, 뭐를 해야 하는지 모르기도 했고요.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대부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어서 어려움도 있었는데, 샤프란 혁명 때문에 부산역 앞에서 처음으로 많이 모였던 거예요. 미안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뭔가 함께 활동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일단 비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시작하자, 이러면서 처음 만들었어요.

첫 사업은 국경 지역 난민들에게 중고 의류를 보낸 것이에요. 8888항쟁 때부터 피해를 입어 온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띤잔 축제! 미얀마에서는 새해에 크게 떤잔 축제를 하는데, 우리는 한국에서 외롭게 보내야 하잖아요. “인천에서는 떤잔 축제 한다던데?” “공장에서 외롭게 지내지만 말고 우리도 하면 되잖아!” 그렇게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띤잔 축제를 했어요. 서로 물을 부려주면서 죄를 씻고 축복하는 행사, 그걸 매년 하니까 서로 더 연대가 되었던 거죠.

사람들은 주변에 따라 변화가 생기잖아요. 어쨌든 관심 없으면 따라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친구들이, 형제들이 좋은 일을 하면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것이 공동체 활동이 커지게 된 이유 같아요. 미안마의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고,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재난이 발생할 때 지원금을 보내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면서요.

2012년부터는 <부산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어서 황금빛살공동체는 고문 역할만 하고 있어요. 후배들이 잘할 수 있는 일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쿠데타 이후로 황금빛살공동체 안에서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이아기도 깊이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왜 민족 차별을 없애야 하는지, 왜 민주주의가 중요한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로만 설명하면 힘들었거든요. 특히 로힝야 이야기 같은 거요. 심지어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이야기도요. 공동체 활동이 깨질까 봐 못했던 애기인데 돌이켜보면 그때 말 못 한 게 후회가 되죠. 지금은 친구들이 말해요. “생각해봐라,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행동의 결과가 ‘지금’인 것이다. 이것만 알면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길이 보일 수 있다.”라고.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시다가 지금은 또 이주노동 상담원으로 일하고 계신데, 가장 보람을 느꼈던 때와 반대로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듣고 싶어요.

처음에는 수원의 프레스 공장에서 일했어요. 산업연수생이라서 최저 임금도 못 받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잔업만 9시간, 그러니까 하루에 17시간을 일했죠. 그게 회사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입으로 “잔업 주세요, 주세요” 하게끔 이 제도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내 실력이 없어서 잔업을 안 주나 막 걱정되고…. IMF 때라 일자리가 없다며 다음 달에 2명을 줄이겠다, 은근히 협박하는 말 들으면 나는 남고 싶으니까 죽도록 경쟁해야 하장아요. 서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요? 옆사람이 아파서 일을 못 하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하게 되는데….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 친구가 손이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제 친구가 다친 그 기계로 다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자꾸 고장나는 건데요. 이 기계로 못 하겠다니까 못 하겠으면 미얀마로 가라더라고요.

그래서 워크맨하고 여권만 챙겨 그 길로 공장을 나왔어요. 매월 강제로 저축하는 돈이 있었는데 포기하고 나온 거죠. 임금 39만 원 중 15만 원을 매월 떼서 420만 원 정도였어요. 22년 전이니까 굉장히 큰 돈이었지요. 그 돈을 포기할 만큼 절박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미등록이다.’

기분이 묘했어요. 똑같은 사람인데 비자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사람을 두렵게 하더라고요.

부산에서 <이주민과 함께>를 만나고 인생에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야, 새끼”같은 반말 대신 ‘또뚜야 씨’라고 불리니까 그냥 인간으로 인정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이주민과 함께> 활동가들 있잖아요, 월급이 아주 적은 거예요. 이주노동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적으면 당장 일자리를 옮기고 싶은데, 여기 활동가들은 좀 심한 거예요. 이렇게 조금 받고 일한다고? 7시에 공장 일을 마치고 산책하다 사무실 앞을 지나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까지 맨날 불이 켜져 있는 거예요. 탁탁탁탁 키보드 두드리고 회의하고….

월급도 적고 잔업수당 받는 것도 아닌데 왜 하는 거지? 생각하게 되면서 저도 모르게 많은 걸 배웠어요. 한국은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고 민주화 운동을 했고, 전태일 같은 사람도 알게 되고요. 이런 분들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구나 안 거죠. 활동가들이 그냥 자기 업무를, 업무보다 의무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달으면서 이 의무를 이어서 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가꾸는 것이라는 걸요.

활동가가 된 저에게 힘들지 않냐고 묻는데, 그런 적이 없어요, 상담을 하니까 입이 아프긴 해요. 문건을 봐야 하니까 가끔 눈도 조금 침침해요. 그런데 정신은 하나도 힘들지 않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왜 힘들어요?

한국은 25년 전 처음 왔을 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노동권이나 한국사회의 시선, 태도 이런 건 좋아졌어요. 물론 한국 사회가 다 좋아진 건 절대 아니에요. 25년 전부터 와서 10년 동안 센터에서 상담해왔는데 그때 경험한 문제들이 아직까지 생기는 걸 보면 답답하지요. 예를 들어 농축산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주변에 센터도 없고 연락할 사람도 없고 통역사도 없어요. 이 사람들에게서 한밤중에 연락이 오면 제가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 지역에 달려갈 수도 없고.

저는 이 사회의 변화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지를 친구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 싶어요. 한국의 최저 임금 올라갔다고 이주노동자들이 그저 좋아할 것만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냥 한국 정부와 사업주가 올려준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이렇게 노력을 해서 한국 사회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들아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혹시 미얀마로 들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전에는 여러 가지 꿈들이 있었어요. 10년 전에 같은 질문을 받고 미얀마에 가서 인권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요, 제가 바보였죠.(웃음) 미얀마 내부에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도 모르
면서 겉만 보고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미얀마로 돌아간다면 인권위원회 다음으로 꾸는 꿈은, 일종의 캠핑 장소를 만드는 거예요. 어린이들과 신나게 축구도 하고, 책도 읽으며 아이들을 교육할 수도 있는 곳이요. 해외에서, 국내에서 인권 활동가들이 와서 회의도 하고 거기서 밥도 해 먹고 잠도 자고 이런 곳 만들고 싶어요. 거기 제 땅이 있으니까 건물만 지으면 되거든요. 그러면 한국에서 미얀마로 와서 교육도 할 수 있고요. 이 꿈이 이루어지려면 군부독재가 빨리 무너져야 해요.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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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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