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이숙견 / 쉼이 되고 힘이 되는

지금 파랑은

쉼이 되고 힘이 되는

그거야말로 무서운 거

올해 딱 20주년이 되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이하 한노보연)>는 <민중의료연합> 노동자건강권사업단에서 출발하였다. 숙견은 20년 동안 변함없이 연구소의 상임활동을 하고 있다.

<민중의료연합>은 보건의료인들이 민중 의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처럼 특정 직종별로 모인 모임은 있었지만 광범위하게 의료인이 연합한 곳은 없었다. 이곳은 간호사, 물리치료사, 약사, 임상병리사 등 의료 관련인 모두가 모여 활동했던 단체였다. 단체의 활동은 보건의료정책센터, 공공의약센터, 노동자건강사업단(부산은 ‘노동보건팀’)으로 세분화해서 활동하였는데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숙견은 <민중의료연합> 부경지부 노동보건팀에서 상근활동을 하다가 한노보연이 출범하면서 부산연구소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하였다.

숙견이 노동안전보건 활동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한 현장 활동가의 교육이었다. 그는 현장의 노동안전보건 활동에 관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던진 첫 질문은 이랬다. “노동자가 일하다가 하루에 몇 명이 죽는지 아느냐?” 속으로 한 명? 많으면 두 명? 이렇게 예상했는데 그의 답은 “여섯 명에서 일곱 명”이라는 것이었다. 일 년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매일, 많게는 일곱 명이 일하다가 죽는다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대학교에서 학생이 공부하다가 죽는다면, 학교의 여러 환경 문제로 하루에 한 명꼴로 학생이 죽는다면 우리 사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노동자가 이렇게 죽어 나가는데. 왜 아무도 관심이 없을까요?”

현장 활동가의 교육은 숙견의 가슴을 울렸다. 그가 노동안전보건운동을 함께하자고 했을 때, 자본의 이윤보다 노동자의 몸과 삶이 더 중요한 사회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 이미 마음이 정해진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있겠구나. 꼭 노동조합운동만 활동이 아니고 노동자의 몸과 건강을 지키는 일, 그러니까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주체를 조직할 수 있는 활동이 될 수 있겠구나.’

2003년 한노보연 부산연구소가 출범하였고, 출범과 함께 숙견의 한노보연 상근활동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전에 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했던 시기를 빼면 거의 오롯이 상근활동을 한 셈이다. 임상병리사로 일할 때도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주민과 함께(당시에는 <외국인노동자인권을 위한 모임>)>에서 신문 편집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숙견은 병원 일을 하면서 노조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일하는 병원은 노동조합이 없었다. 그 당시 부산지역에는 병원 노동조합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던 병원 노조는 적어도 2차 병원급 이상 되어야 노동조합이 있었다.

학생 때부터 배웠고 관심이 많았던 노동운동을 단절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쉽지 않았다. 93학번인 숙견의 동기 중에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제자였던 <부산지역고등학교협의회>에서 활동했던 동기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졸업하고 취업했다고 해서 운동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민중의료연합>의 활동에 더 마음을 썼는지도 모른다.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안정된 일자리가 있고, 짬을 이용해 시민사회단체의 자원봉사활동과 회원 활동을 병행하는 삶은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적당히 편안하고 적당히 뿌듯한 상태 같은 거 말이다. 그렇지만 숙견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상에 좀 젖어 든다고 해야 되나. 그러니까 내가 여기 이 상태로 계속 있으면 그냥 평범하게 살다 가겠구나. 내가 너무 만족하게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모르겠어요. 저는 그러는 게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침 <민중의료연합>이 세 가지 활동을 축으로 활동을 확장하고 있을 때, 노동자건강권사업단 활동을 하던 선배가 제안을 해왔다. <민중의료연합>이 목표로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산지역에서 노동안전보건운동을 보다 집중적으로 모색하고 현장 활동가들과 만나서 노동자 건강권 쟁취와 안전하고 건강한 현장을 위해 함께하자고….

숙견은 미련 없이 병원에 사표를 내고 노동안전보건운동에 집중하는 활동을 하기로 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꿈나무장학기금

가족들은 처음에는 잘 이해를 못 했다. 어렵게 공부해 취직해 놓고선 왜 다른 길을 택할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숙견의 결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숙견이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견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미루고 암이 재발한 어머니를 돌봤다. 2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으로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자 뒤늦게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보기에 숙견은 늘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본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주면 될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과 상임활동을 하는 숙견은 돈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았다. 하고 싶은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수입이면 충분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에서 숙견의 몫이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부모님의 유산 중 일부를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 이름을 딴 ‘박말임 꿈나무장학기금’으로 조성했다. 부모님은 힘들고 가난했던 시대를 겪었지만,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삼 남매를 부양하고 공부시켜주신 부모님에게 항상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많았다.

“당신들도 공부하고 싶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조차 갈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뒤늦게라도 배움의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너무나 일찍 찾아온 병마로 그러한 기회조차 가질 수 없으셨죠. 너무 안타까웠어요. 사실 너무 일찍 돌아가셨기에 남들 다 가는 제주도조차 가보지 못하셨거든요.”

당신들을 위해선 십 원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살뜰 모은 돈을 의미 있는 일에 쓰고 싶었다.

숙견이 활동하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오랫동안 <이주민과 함께>와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주민과 함께> 활동을 알게 되고 참여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부설기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사업 중 베트남, 캄보디아 장학사업을 알게 되었다. 숙견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작은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배움의 기회가 좀 더 나은 삶으로 연결되잖아요. 우리 어머니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있었다면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박말임 꿈나무장학기금’은 이러한 마음에서 진행되었고, 다행히 캄보디아에서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 3명을 도울 수 있었다. 숙견은 자기가 캄보디아 장학사업에 큰 역할은 하진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도 있어서 하늘에 계시는 부모님도 크게 기뻐하실 거라고 믿는다.

건강하고 행복한 일터

막상 연구소 일을 시작하고 보니 쉽지만은 않았다. 계속되는 사망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막막해하면서 깊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한노보연의 상임활동가와 회원이 함께 활동했지만, 부산지역은 온전히 숙견이 중심에서 활동을 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지역이었고 현장이었다. 하지만 고민에 비해 역량이 늘지 않고, 운동의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책을 하기도 했다. <민중의료연합> 활동을 포함하여 활동한 지 10년에 접어든 2010년 즈음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 하릴없이 귀촌 사이트를 뒤적이면서 차라리 연구소에서 내가 빠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진지한 귀촌 고민이었다기보다는 돌파구 혹은 도피할 곳을 찾는 기웃거림이었다.

“어제도 누가 죽었는데, 오늘 또 산업현장에서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내가 더 역량이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일을 잘해서 성과를 만들었다면 괜찮았을까? 출범한 뒤로 쉬지 않고 달려온 거 같은데 대체 이뤘다고 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오히려 이쯤에서 내가 그만두는 게 조직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활동가로 사는 삶을 택했건만 몸과 마음은 완전히 바닥에 눌어붙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때 마침 새로운 상임활동가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일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은 비록 3년 동안이었지만 힘든 시기에 많은 힘을 받았다. 더불어 안식년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반올림 투쟁과 석면추방 활동을 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의 역량 강화도 필요했다.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우울감이 사그라들었다.

2014년 1년이라는 귀중한 안식년을 받아 캐나다로 떠났다. 언어 연수를 목적으로 갔다고는 하지만 사실 언어 실력이 월등하게 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멀고도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지내면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잘 다스려지고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하는 힘을 얻은 시간이었다.

다시 복귀해 열심히 활동하던 중 지난 해인 2022년에 두 번째 안식년을 가졌다. 그러니 20년 활동 기간을 통틀어 두 번의 온전한 쉼이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연구소에 안식년 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안식년은 주로 교수나 성직자들에게 부여된 제도이다. 하지만 연구소는 안식년 제도의 필요성을 논의할 수 있었고, 상임활동가는 물론 많은 회원이 안식년 제도의 필요성에 동의해 주었다. 내부에서 준비 기간만 2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 당시 생각하면 다른 단체에 비해 안식년 제도를 빨리 도입한 거죠. 더군다나 6년마다 1년의 안식년을 갖기로 했어요. 아마 이러한 안식년 제도가 있는 단체는 거의 없을 거예요.”

시민단체의 일이라는 게 상근자가 빠지면 운영 자체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년은커녕 안식월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안식월이 있어도 기간이 너무 짧아 안식월 앞뒤 2주는 계속 일해야 하는 것이 상임활동가의 현실이다. 안식년 혹은 안식월 자체를 아예 꿈도 못 꾸는 게 대부분이다.

때론 단체의 여러 사정에 따라 자발적 안식을 택하는 때도 있다. 후원회비나 회비로 운영되는 시민사회단체 특성상 늘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기 때문에 상근자는 한편으론 재정적 고민을 하면서 인건비를 받지 않고, 어쩔 수 없는 비자발적 선택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투쟁현장에서 생긴 심리적 상처나 번아웃에 이른 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안식 기간 동안에도 생계를 걱정하거나 단체의 활동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한노보연>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연구소는 안식년 기간 동안에도 임금 지급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오롯이 쉼으로써 활동할 힘을 얻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물었다.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기사만 봐도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버티냐고, 힘들지 않냐고 말이다.

“지옥이 여기만 지옥이고 저기는 지옥이 아니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건데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크지 않을 때는 답답하고 두렵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기쁘지요. 만약 병원에서 일하며 돈만 벌었다면 저는 더 힘들었을 거예요.”

다치고 병들고 죽는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안일하게 살아버리는 것, 그게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때와는 노동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이 만들어진 1980년대에는 노동이라 하면 중공업, 건설업, 제조업 이런 형태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법 또한 그 기준에 맞춰 제정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비정규직이 생기고 서비스직도 많아지고 플랫폼 노동까지 생겨났다. 다양한 형태의 노동조건을 담을 수 있는 법이 절실하지만 현행법은 그렇지 못하다.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끊임없이 나왔지만 쉽지 않았다. 김용균의 죽음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원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를 강하게 불러왔다. 다행히 지난 정권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두 번째로 전면 개정되었다. 중대재해 처벌법이 만들어졌고, 산업안전보건법 대상에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 하청업체 관리에 대한 원청의 책임 부분도 들어갔다. 아직은 미비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는 희망이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전에 비해 달라지고 있으니까.

숙견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인식이 변한 것을 꼽는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일을 하는데 뻔한 거 아니겠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런 분위기는 아니게 되었다. 누구의 죽음 앞에서도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어 다행이다.

인식이 변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해준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안전하고 행복해야 한다. 숙견은 행복하게 일한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고 그들이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힘들 때도 많지만 어떻게든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습은 거룩하다. 고통 또한 함께 느끼고 연대하는 이들이 있어서 아름답다. 지옥 같은 세상일지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어야 하니까,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2022년 일터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가 2,223명이라는 통계를 봤어요. 하루 평균 6명의 노동자들이 출근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인데요. 우리 사회에 안전한 일터와 건강한 일터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작업장에 안전장치와 보호장비를 설치하는 것보다 사고가 나더라도 벌금 내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기업의 계산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사법체계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우리 사회가 기업의 이윤보다 노동자와 시민의 몸과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매일 5~6명의 노동자가 죽지는 않겠죠.

노동조건과 작업환경에 대해 노동자가 개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게 중요해요. 노동자의 일터와 우리의 일상에서 효율과 이윤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논리에 대응하는 힘을 가질 때 안전한 일터,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 되겠지요.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높아져야 하고요, 현장에서 활동과 투쟁을 만들어내는 현장 활동가가 많아져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노동현장에서 주도권을 가진 주체가 되는 것이 개별 기업을 넘어 산업별로 또 지역 차원의 노동운동 확대로 이어져야 하고요.

노동자는 모두 시민이기도 하잖아요? 시민사회운동에서도 노동운동과 함께 안전한 일터를 기본으로. 나와 가족이 살아가는 지역 전체의 안전과 건강으로 확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힘들이 모여야 노동자와 시민을 대변하는, 제대로 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고, 일터와 삶터에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어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 중 ‘당장멈춰팀’이 있던데 그건 무엇을 멈추도록 하는 것인지요?

‘당장멈춰팀’은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조차 알려지지 않는 중대재해 상황을 알리고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2013년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현장이 있으면 바로 찾아가서 제대로 조사할 것, 재발방지대책 마련할 것을 요구합니다. 연구소 회원들이 전국 곳곳의 현장에 있어서 잘할 수 있는 활동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활동을 하다 보니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현장에서 워낙 많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어요. 발생한 중대재해 정보, 업체명, 사망사고 장소, 사망사고 원인, 재해조사 결과 등이 외부에는 비공개로 처리되고 있어서 접근이 아주 어려웠어요. 오히려 중대재해나 산업재해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막는 것이 중요해요. 위험한 작업이나 법을 위반한 작업을 강요받을 경우 노동자들이 멈출 수 있는 권리, 즉 작업중지권이 현장에서는 더 필요한 거죠. 그래서 점차 ‘작업중지권’ 활동으로 중심을 옮기게 됐어요.

2015년에 작업중지권에 대한 현장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전국의 여러 현장과 노동안전보건단체들과 간담회를 진행해 현장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장멈춰팀’이 만들어지게 됐어요.

연구소에는 직업환경분야 의료인 여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노동보건 부문에서는 전문성이 높아요. 노동안전 영역에서도 전문성이 필요해 안전역량 강화사업을 중장기사업으로 선정해 지금의 당장멈춰팀 활동으로 이어오고 있어요. 2019년부터 중대재해의 원인을 파악하고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중대재해조사보고서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고, 당장멈춰팀과 미디어 활동가인 뻐꾹님의 콜라보로 영
상도 만들었어요.

덧붙이자면 노동조합의 참여권 보장을 강조하고 싶어요. 중대재해 처벌법1)이 제정되고 시행되었으니 기업에서는 안전의식을 좀 더 높이고 중대재해를 낮출 수 있도록 토론회도 하고 해외 사례도 소개해요. 저희는 안전에 있어서 정부와 기업의 역할과 더불어 노동조합의 참여권 보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열심히 강조하고 있어요.

1)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 처벌법)은 2021년 1월 8일 국회에서 의결한 법으로 안전 및 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여 인명피해를 유발한 사업주, 경영책임자, 공무원 및 법인의 처벌 등을 규정함으로써 중대재해를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1월 26일 공포되었다. 우선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사업⋅사업장의 경우에는 법 공포 후 1년이 경과하는 시점인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었고, 개인사업자 및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사업장의 경우에는 3년이 유예되어 2024년 1월 27일부터 시행된다. 안타깝게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있었다면 무엇인지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며 참 많은 분을 만났고, 너무 많은 활동을 해서 한 가지를 꼽기가 어려운데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산업재해 피해 당사자를 만나고 함께 싸웠던 활동이에요.

연구소는 2008년부터 <반도체노동자건강과인권지킴이(이하 반올림)> 활동을 함께하게 되었어요. 첫 번째 피해자인 황유미 님의 아버님인 황상기 님이 삼성과의 투쟁을 시작하면서 반올림이 만들어지고 연구소도 적극적으로 활동에 결합하게 됐어요. 반올림 활동 초기 때는 반도체산업이 희귀성 질환을 포함한 암 발생이 매우 높은 사업장이란 걸 알리는 게 중요했어요. 반도체산업은 청정산업이 아니라 화학물질을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는 사업장이고, 노동자보다는 ‘반도체’ 중심의 작업환경이라는 것, 20~30대 노동자에게 발생한 희귀성 질환과 암은 작업장에서 생긴 직업병이라는 거죠. 직업병이기 때문에 직업성 질환 피해자를 발굴하고 조직하는 게 매우 중요했죠.

주로 경기도,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피해자 발굴을 위한 선전전과 회사 앞에서 캠페인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삼성 반도체 공장과 하이닉스 등 반도체 회사는 전국의 많은 노동자가 대규모로 입사를 한 회사거든요. 그래서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피해자 발굴을 위한 캠페인과 선전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9년부터 부산에서 매주 서면 지하철 환승역에서 선전전을 시작했어요. 3년 넘게 선전전을 하면서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심각성을 알려내고 산업재해 인정과 서명운동을 진행했어요. 그 과정에 피해자를 찾아내고 산업재해 신청과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 진행도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이후 반올림 투쟁은 2018년까지 연구소의 중요한 활동이 되었죠.

석면 질환 피해자들과 함께한 활동도 기억에 남아요. 부산은 과거 최대 석면 방직공장인 제일화학이 가동되었던 지역이에요. 2007년 제일화학 주변에 거주한 주민에게 석면 질환인 악성 중피종이 발병했고, 다른 지역보다 석면 질환 발병률이 7~8배 높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어요. 석면 노출에 의한 환경성 질환의 문제와 석면의 위험성이 알려진 거죠. 석면공장 인근의 주민 피해도 문제가 됐지만, 제일화학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도 알려지게 됐죠. 2008년 부산 석면 질환 피해자모임이 구성되고 전국적으로 석면피해자모임이 확대되면서 석면피해자 발굴과 대응 활동을 함께 했어요.

석면 질환은 잠복기가 10~40년 정도예요. 부산은 석면 방직공장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지역이라서 석면 사용이 전면 금지된 2009년까지 석면 노출로 인한 피해 노동자와 시민이 많았어요. 그런데도 석면피해자들의 치료와 보상에 대한 구제제도가 전혀 없었죠. 워낙 대규모로 사용되던 석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석면 해체와 석면 관리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어요. 전국에서 모인 석면피해자와 함께 석면피해구제법 제정, 직업성 질환 인정기준확대, 석면안전관리법 제정, 학교 석면 건축물 해체 기준 수립 등 많은 활동을 함께했죠. 이윤만을 중시하는 기업의 반인권적인 노동 환경, 정부의 미흡한 제도, 관리 감독의 부재는 많은 직업성 환경성 질환 피해자를 만들었지만, 각성한 피해자와 시민의 투쟁이 미래의 피해자들을 더 이상 만들지 않게 하는 활동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어떤 활동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마음을 쓰고 계세요?

2023년 10월 24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출범한 지 20년이 돼요. 2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기획하는 중이고요, 단체의 전망과 운영에 큰 변화도 있을 예정이라 엄청 바쁘게 준비 중이에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그동안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 노동강도 강화저지 투쟁, 업무상 정신질환 대응활동, 심야노동 철폐, 반올림 투쟁, 석면추방 운동 등 우리 사회에서 은폐되어온 직업병을 드러내고 노동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해왔어요. 이런 활동 덕분에 노동안전에 관심도 높아졌고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더 큰 성과는 피해 당사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김용균 님 어머니 김미숙 님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김용균 재단>이 만들어진 것처럼요. 그리고 연구소의 전문성도 높아져 안전문제가 생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찾는 분들도 많아요. 이 모든 활동을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회비만으로 독립 재정을 운영해 온 것도 한노보연의 창립 멤버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올해 20주년을 맞아 조직을 새롭게 전환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지금까지 ‘활동회원’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면, 앞으로는 회원과 후원회원을 통합해 다양한 영역과 공간에서 다양한 주체들과 함께 노동안전보건운동을 연계한 활동을 모색해 보려고 해요. 회원도 천 명 수준으로 늘려보고 싶고요. 부산에서도 11월에 20주년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에요. 연구소가 활동한 지 20주년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지역에서 연구소를 모르는 시민사회단체가 많아요. 이번 20주년 행사를 통해 많이 알리고 싶어요. 그동안 연구소가 진행했던 노동자 건강권 의제와 활동을 소개하고, 앞으로 지역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과 건강을 함께 고민하고 모색해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부산사무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조건을 만들고,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건강과 삶을 기준으로 노동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로 노동자의 몸과 삶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연구와 교육활동,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 부산운동본부와 같은 지역 연대사업, 노동조합 자문 및 지원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대로 256번길 7 SM빌딩 4층
전화번호: 051-816-3438
홈페이지:http://kilsh.or.kr/

5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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