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최영아 / 다 다르고, 다다르고

지금 파랑은

다 다르고,다다르고

고립에서 자립으로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건널목 하나 건너는 짧은 거리를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에 앞서 점심부터 먹었다. 밥집에서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가려면 골목을 조금 지나 건널목 하나를 건너면 바로 앞이다. 보행에 불편을 겪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속도는 결코 비장애인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기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에 얼추 일곱 명 정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느라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한 것이다.

“어디 가세요?”, “잘 지내지요?”. “언제 올 거예요?”, “점심 드셨어요?’ 등등. 낯익은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묻고 답하려면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몇은 거주시설에서 공동생활을 하다가 자립한 사람들이다.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인근에 정착해 생활하면서 센터의 프로그램도 이용하고 자주 방문하니 잘 알고 지내는 것이다.

최영아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중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실시한 장애인 정책은 장애인 거주시설 중심, 다시 말해 장애인을 시설로 보내서 사회와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생활하던 분들이 지역사회로 나와서, 우리 이웃으로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한다.

함세상장애 인자립생활센터 에서는 설날에 모여 떡국을 먹고 세배를 나눈다. 이또한 자립을 지원하는 일이다. 사실 장애인 당사자들은 거주시설에서 나와도 어려운 점이 많다. 부모, 형제가 없어서 의지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는 경우도 많다. 교류할 수 있는 친구도 많지 않아서 외롭게 지내는 경우도 있다.

평생 거주시설에서 지내온 사람에겐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가 않을 수 있다. 그냥 다들 자연스레 알 것 같은 그런 단순한 것들 말이다. 서로 안부를 묻고 챙기는 거, 특별한 날에 하는 의례적인 행위들, 명절놀이 같은 단순한 것조차도 낯설 수 있다. 지역사회 주민으로 살아가려면 거주시설 안에서 했던 한정된 경험 말고 ‘일상’을, 그냥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립과 분리를 벗어나 자립하여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

내 탓도 내 운도 아니므로

영아는 엄청 추운 겨울,음력 11월에 태어났다. 실제로는 1968년생이지만 주민등록에는 69년생으로 되어있다. 어른들은 출생신고를 제때 하지 않았다. 그 시절 태어난 장애인은 출생신고가 늦은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아기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아에게는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우짜겠노?  내 마음대로 내 몸이 바꿔지는 것도 아니고. 이래 살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계단이 높으면 억지로라도 올라가려고 기를 쓰고, 그래도 못 올라가면 안 가버리고 마는 태도였다.

초등학교는 혜성학교를 나왔다. 처음부터 특수학교를 가려고 한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국민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지만,학교는 장애를 지닌 어린이가 다닐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 측은 특수학교를 권했다. 사실상 입학 거부였다. 혜성학교 시절은 아주 행복했고 그때 친구들은 지금도 가장 친하다.

중학교는 일반학교로 갔지만, 영아가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부모님은 화장실 개조에 필요한 후원금을 냈다. 교육열이 낮았거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2층이나 3층에 있는 교실로 가지 않도록 반 배정을 받았다. 그것도 아마 부모님이 학교 측에 부탁을 한 결과였을 것이다. 체육시간은 물론이려니와 가사수업이나 과학실험 시간이면 홀로 교실을 지켰다. 특별실은 4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은 ‘그냥 안 가는 것으로 하자’고 결론지었다. 입학시험은 쳤지만 면접이 문제였다. 면접 점수가 당락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필수였다. 그런데 면접장으로 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높은 문턱이었다. 대리석 계단을 몇 층이나 올라가야 했으니까. 설령 어찌어찌 면접시험을 치더라도 입학 이후에는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교하는 것부터 강의실 이동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걸렸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이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모님을 졸라서 자동차를 장만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장애인용 핸드 콘트롤러를 달고 아는 분한테 부탁해 연수까지 받았다. 갓 스무 살 여성이 운전을 하는 게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다.

남들은 멋지다고 하지만 그것은 장애로 인한 선택이었다. 신발 속에 보조기를 끼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빨리 지치기도 하고 느린 데다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버스를 타는 것도 힘들다. 계단을 올라가서 중심을 잡고 서있는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택시를 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장애인 콜택시도 없었다. 차를 몰고 마음껏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서른 중반에 우연히 장애전담어린이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원생들의 등하원을 위한 승합차 운전이었다. 빨간색 사랑의 열매 로고가 그려진 차여서 아이들이 ‘열매샘’이라고 불러주었다. 열매샘 최영아는 어린이집 인근 동네를 구석구석 운전해서 다녔다.

그렇게 일하다 자연스레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들을 만나게 되었다.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지금은 어린이집이라도 다니고, 이렇게 케어가 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장애를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장애전담어린이집의 부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내가 장애인으로 태어난 거니까 이건 내 문제고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탓이오 하면서 비장애인들의 세계에 억지로 맞춰가며 사는 태도 말이다. 이건 내 운이니까,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쩔 거야 하면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에 억지로 맞춰 살았다. 버스를 못 타니까 비싼 택시 타야 하는 거고, 계단이 있으니까 포기해야 하는 거고,학교 화장실이 불편하니까 개조 비용 내는 거고…. 각자 알아서 애쓰고 능력 되는대로 알아서 해결해야지 뭐, 하는 태도였다. 자신의 장애가 도드라지지 않도록 숨기고 비장애인의 조건에 맞추려 발버둥쳤을 것이다. 다리에만 보조기를 끼우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인식에 보조장치를 달고 사는 줄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런데 장애아동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 열매샘 최영아를 통해 자기 아이의 미래를 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고민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이 현장 활동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속도를 맞추고

“나를 온전히 드러내놓고, 나의 신체가 곧 교육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영아는 당사자 활동가로서 동료 지원, 동료 교육과 상담에도 활동의 많은 비중을 둔다. 또 한편으로는 장애인 콜택시 기사와 교사 같은 직업군과 초중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한다. 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개선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응하려는 것이다.

특히 교사보다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 어린이들의 생각이 바뀌면 정말 괜찮은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진실로 편견 없이 잘 받아들인다. 차라리 어른보다 대화가 잘 된다고 할 정도다. 어린이들 눈에는 칠판 앞에 있는 강사의 신체가 이상하다,혹은 다르다고 느껴질 때 어른처럼 점잖게 위선을 떨지 않는다. 궁금한 건 바로 물어본다. “쌤, 다리가 왜 이렇게 가늘어요. 왜 그래요?” 이렇게. 그러면 오히려 편하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장애를 편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눈과 마음이 오고 가는 시간이 된다.

자기와 좀 다른 친구들,예를 들어 발달장애 친구가 한 반에서 생활하는 학급이라면 어떨까? 이 경우 그 학급의 어린이들은 발달장애에 대한 이해가 높다. 점잔 빼는 어른들보다 훨씬 말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생활해오면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다르구나, 그러니 이렇게 하면 되네, 하는 것이다. 나와는 좀 다른 친구지만 같이, 함께 하는 것을 자연스레 익히는 것이다.

그는 부산의 경우 통합 유치원과 통합 학급이 좀더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치원 때부터 같이 지내면서 교육을 받으면 장애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변할까? 우리 사회의 인식이, 구조가 변화하게 될 것이다. 비장애인이 ‘내 친구를 위해 이런 것도 필요하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동분서주, 빠르게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목발을 이용하던 예전에는 이동 자체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더 열심히 활동하고 싶은데 불필요한 체력 소모를 감수할 필요가 없어서 요즘은 전동휠체어를 이용한다. 이렇게 편한 걸 왜 진작 이용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신속하고 유용하다.

사실 전동휠체어로 바꾼 것은 속도를 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속도를 맞추기 위한 것도 있다. 활동의 동지이자 배우자인 남편 때문이었다. 연애 시절 남편은 전동휠체어를 타는데 영아는 목발을 썼다. 남자친구가 간간이 멈추고 기다려줬지만 자신보다 너무 빨랐다. 그렇다고 자기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는 것도 안 되었다. 그 무거운 전동휠체어를 무슨 수로 자동차에 훌쩍 태우겠는가?

슬슬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더 활동적으로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욕망이 목발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어딘가로 가기 위해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많이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해야하는 일이 많았다. 사랑하는 이와 속도를 맞추다 보니, 자신의 활동에 속도를 내게 되었다! 아주 바람직한 부수 효과였다.

가끔 부부싸움 비슷한 일이 있기는 하다. 다른 부부와 다른 점이라면 일에 대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활동의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되니 안 되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편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고 언제든 친구들을 함께 부를 수 있어서 좋다. 만약 누군가 10년 후에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넓은 공간, 그러니까 넓은 마당이 있는 넓은 집에서 남편과 지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카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구나 와서 쉬었다 갈 수 있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꿈꿨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생각이지만, 지금도 비슷한 꿈을 꾼다. 좀 넓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곳에 누구든 편안하게 와서 여럿이든 혼자든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남편과 그가 함께 꾸는 꿈이기도하다.

예를 들어 시설에서만 오랜 세월 생활하다가 자립하신 분이 있다고 치자. 고령이 되어서 사회로 나온 경우 경험 부족으로 인한 행동의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몇십 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일상의 경험이 부족하다. 혼자 외출하고 장을 보고 나만의 소유인 물건을 갖고 관리하는 것 등 사소하면서도 동시에 전반적인 생활에서 그러하다. 그는 이런분들에 대한 사후 지원이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경계성 지적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 지역사회로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도 사후 지원이 매우 중요한데 아직은 부족하다.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기관과 시민사회가 협력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립해서 지역사회 사시는 분이 아무 때라도 편하게 올 수 있는 곳, 그런 넓은 공간이 있다면 논의가 쉽지 않을까?

그는 말한다.

“인권은 사람마다 다르다,다르고 달라서 너무나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거라고 봅니다.”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들어섰을 때 첫인상은 공간이 넓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북적북적해서 놀라웠다. 휠체어만 하더라도 평범한 의자식에서 거의 눕는 자세의 방식까지 다양했다. 다양한 보조기기와 다양한 소통법, 그러면서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첫 방문자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다 다르다니, 게다가 이 공간 전체를 꽉 채우는 에너지는 뭐지? 하며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에너지가 바로 인권 활동가 최영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언젠가 배리어 프리한 캠핑카를 장만해 친구들과 넓은 세상을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그. 누구나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누구나 떠날 수 있는 삶에 다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다 다른 우리를 이해하고,함께 할 때 가능하다.


장애인인권현장에서 오래 활동하고 계신데요, 최근 어떤 현안에 가장 마음을 쓰고 계세요?

올해는 탈시설 당사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무연고자의 마지막을 함께 돌보는 공영장례제도의 안착과 확대를 위한 연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모든 장애인의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탈시설 운동을 위해서죠. 무연고 시설 거주 장애인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노력과 더불어 사회적인 지지 네트워크가 광장히 중요하거든요. 현장에서 다양한 지지 네트워크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정책적 변하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저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 사람 중에 가장 취약한 분이 거주시설에서 생활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과거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거주시설 중심이었어요. 장애인을 시설로 보내 분리시키고 사회에 없는 존재로 여기며 건물을 만들고,지하철을 만들고,정책을 만들었잖아요. 하지만 저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분들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게 해드리는 게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주거,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죠. 이제는 이 사회에 너무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정책을 만들고 도시를 설계해야 한다고 봐요.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이 재활에서 자립으로 변화하면서 커뮤니티케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졌어요. 커뮤니티케어의 가장 중요한포인트는 고립 위주의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며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독립하는 것은 어렵다고 미리부터 선을 긋는 분들이 많아요. 중증장애 자녀를 둔 보호자들이 지역사회에 아무런 준비도 안 되었는데 무조건 탈시설만 이야기하는 게 맞냐고 불안해하시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지역사회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 단계라고 여겨져요. 시민들의 인식을 서서히 바꿔나가야 할 테고,여러 과제가 남아있어요. 당사자분들이 겪는 어려움도 많고요. 현재 운영 중인 활동지원도 충분한 것이 아니고,전반적으로 사회 서비스가 부족하죠. 지원인력확충도 필요하고, 장애인의 일할 권리에 대한 논의도 해나가야 해요. 이 모든 게 장애인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거든요.

비장애인이 누리고 있는 의료접근성, 행정접근권, 보행권과 이동권을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누릴 수 있는 삶, 그게 바로 장애 해방이죠. 그리고 장애가 장애인만의 고민,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8대 부산광역시의회 시의원 활동을 하면서, “나에게는 시의회도 하나의 ‘현장’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의회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기대했어요. 시의원의 주장이라면 같은 행정부 공무원이라도 조금 다른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시의원 동료들의 인식은 행정부 공무원과는 다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당시 행정부와 공무원사회의 장애에 대한 인식이 뒤처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도시철도 역사마다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했을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산이 부족해 다 설치할 수 없으니 한 역사씩 띄워서 설치하면 옆의 역에 내려서 와도 되지 않냐”고요. 긴급상황이나 재난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인근 역사에 내려서 걸어오라는 말을, 도대체 어떤 시민에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때 이 사람들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편적인 권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동권을 여건이 허락되면 제공될 수 있는 것, 시혜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거죠.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인식과 멀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요. 제 입을 통해서 전달하는 장애인들의 요구에 대해 행정부 공무원들은 여전히 한 정거장 먼저 하차해서 걸어가면 되지 않겠냐는 식의 반응을 하기 일쑤였거든요.

비장애인 시의원들 사이에서 저는 여전히 장애인으로서 투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처음 상임위 활동으로 현장 방문을 진행할 때,휠체어를 탄 저와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어요. 저 혼자 장애인용 택시를 타고 따로 이동했지요. 의원회관의 장애인 화장실에는 문이 아니라 간이가림막(자바라)이 설치되어 있었고요. 제가 일하면서 의회 버스에 월체어 리프트를 장착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장애인 화장실에 문도 설치했지만 무거운 마음도 남아있어요.

행사 하나하나마다 일정 하나하나마다 장애인 시의원 최영아와 함께 하기 위해 준비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불편하지 않을까?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챙겨야 하니까요. 나의 요구가 과도한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학창시절 부모님이 사비로 학교에 장애인용 화장실을 설치해가면서 진학을 시켰던 시절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어요. 한마디로 서글펐지요. 하지만 그런 시절을 거쳐서 지금의 환경이 구축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제가 더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동료 시의원들이 그러더군요. “왜 이렇게 욕심이 많냐? 장애인 예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저는 그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책으로 만들고, 예산을 늘리기 위해서 일했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다른 사회복지 대상자들과 예산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장애인의 삶이 권리의 차원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여전히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된다는 것도 느꼈고요. 이런 현실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도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동료 시의원들의 장애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부터 먼저 해야 했어요.

시의원으로서 업무를 하기 위한 물리적 환경을 만들고, 정책과 예산을 만들 때 장애인에게 이것이 왜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 과정은 의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투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시의원 활동이 있다면요?

제가 투쟁 현장에서 10년이 넘도록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 중 하나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24시간 서비스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에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그 개인에게는 생존이자 자립의 기본 권리고, 우리 사회의 복지가 가야 하는 방향이기도 해요. 24시간 활동지원이라는 제도의 개선을 이런 방향으로 시도하고 또 결과를 남겼다는 게 제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특히 시의회에 들어온 첫해에 예산을 만들었는데, 의원으로서는 이것이 가능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효능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갖는 계기도 됐어요. 현장에서 장애인의 삶과 요구를 이해하는 누군가가 의정에 참여해 정책과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그래서 저는 활동가의 정치적 활동을 추천합니다. 현장에 있던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도출된 요구를 더 효율적으로, 더 정확하게 실현해낼 수 있거든요. 투쟁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집단활동을 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에요. 동시에 이런 현장의 요구와 내용을 정책화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공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정부를 설득하고,압박하고 의회를 조직화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현장을 아는 사람이면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후배 활동가 중 누군가는 이러한 역할을 꼭 해주기를 바라요.

어쩌면 삶 자체가 현장이고 존재 자체가 활동가인 삶을 살아오셨다고 느껴져요. 그런 현장의 활동가로서 꿈이 있다면요?

저는 장애활동가고요, 또 당사자예요. 장애 인권운동현장에서 당사자들과함께 활동하는 걸 좋아하고, 장애 당사자로서 같이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곳곳에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사회가 이분들의 목소리를 잘 안 들어주니까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리게 하는 일에 노력하는 사람요.

지금은 함세상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우리 센터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장애인 거주시설에 거주하거나 지역사회에 살더라도 고립되어 계신 분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자립해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고요. 또 한 가지는 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싸우는 거예요. 장애로 인해서 혹은 시설에 살면서 누리지 못했던 인권과 권리로서의 서비스를 확대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어요.

저는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장애 해방 세상을 꿈꿔요. 장애를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숨기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해요. Disability Pride, 장애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2005 년부터 부산지역 장애인의 인권 보장과 자립생활 권리 확보를 위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투쟁,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제도 마련, 자립생활권리 보장을 위한 활동, 탈시설권리 보장까지 장애인과 관련한 차별과 모순을 철폐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제도화하는 활동에 앞장서왔습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243, 한울빌딩 5층(대연동)
전화번호: 051-627-0311
홈페이지: https://www.hamc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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