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는 다양한 현장의 활동가들이 힘껏 틔워내고 애써 일구어온 인권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2022년부터 파랑이 <모여랑>과 <오늘의인권>을 통해 만난 인권의 자리들만 해도 도시빈민,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 퀴어, 노동, 기후환경 등 38곳에 이릅니다. 하지만 저마다의 질문과 방식으로 만들어온 인권의 자리들이, 같은 지역 안에서도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운동을 만나 기록으로 잇는 네트워크 프로젝트 <연결되는 인권의 자리들>을 시작합니다. 활동가가 다른 활동가의 현장을 찾아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만남을 인터뷰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앞으로 소개될 이야기들에는 우리 곁에 인권의 자리, 그곳을 일구어온 사람들, 그리고 서로의 만남에서 발견한 새로운 연결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 귀 기울인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인권의 자리를 발견하고, 지역 인권운동을 함께 응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서로의 운동을 만나 새로운 연결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만나볼까요?
곁을 잇는 시간
‘미얀마 민주항쟁연대 부산네트워크’ 김그루 인터뷰
(기록: ‘부산어린이어깨동무’ 정은주)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저항을 시작했고, 항쟁은 5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미얀마에서는 여전히 군부에 맞선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 머무는 미얀마인들도 자신이 번 돈을 모아 고국의 사람들을 돕고 있다.
부산에서도 연대는 이어졌다. 처음에는 매주 부산역에 나왔고, 사진전을 열고 모금을 하고 캠페인을 벌였다. 참여하는 사람이 줄고 한 달에 한 번의 만남마저 관성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미얀마 민주항쟁연대 부산네트워크는 그 끈을 놓지 않았다.
그곳에 김그루 활동가가 있었다.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과 만나고 노동 현장에서 활동해온 그는 미얀마의 민주항쟁을 멀리 있는 다른 나라의 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가늘게라도 이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김그루 활동가가 미얀마 민주항쟁연대 부산네트워크에 함께하게 된 과정과,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과 만나며 이어온 활동에 대해 들었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 사람들은 공개적인 항의행동을 하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여럿이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국인들에게 지지받지 못할까봐 걱정했지만 이건 무조건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정은주: 미얀마 민주항쟁연대 부산네트워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김그루: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게 2021년 2월 1일이에요. 저도 미얀마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고, 또뚜야 선생님을 비롯해 알고 지내던 미얀마 친구들도 있어서 더 놀랐죠. 다들 “어째야 되노, 어째야 되노” 하다가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모였어요.
그전부터 <이주민과 함께>에서 오래 활동했고, 당시에는 <금속노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주와 아시아 인권·평화 문제를 함께 고민해온 사람들과 기존 관계가 있었죠. 예전에 <이주민과 함께>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 활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래서 일단 모여보자고 해서 회의를 시작했죠.
당시가 코로나 시기였어요. 쿠데타 이후 미얀마 사람들은 공개적인 항의행동을 하고싶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여럿이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국인들에게 지지받지 못할까봐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건 무조건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제가 당시 있었던 <금속노조 서부산지회> 준비위에 미얀마 조합원이 여섯 명 있었어요.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에 가입해 교섭도 하고 단체협약도 체결했던 이들이었죠. 그 조합원들과 같이 피켓을 만들면서 첫 집회를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집회를 시작한 뒤 2021년 3월에는 네트워크를 꾸려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어요.
집회에서 사용할 피켓을 만들고 있는 모습
“장기투쟁 하는 곳들을 보면 ‘저래서 될까’ 싶은 때도 있지만, 계속 꿈틀거리고 외치면서 ‘우리가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걸 알리다 보면 어느 순간 국면이 바뀌는 때가 있죠.”
정은주: 처음에는 매주 집회를 하셨어요. 지금까지 계속 이어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김그루: 초기 1년 동안은 매주 집회를 했어요. 매주 하면서도 다들 너무 안타까워했고 진심으로 참여했어요. 사람도 많았고요. 집회 뿐만 아니라 미얀마 민주주의 사진전, 모금활동, 서명운동, 간담회, 미얀마 투자 한국기업 규탄행동, 난민지원을 위한 토크콘서트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군부집권이 장기화되고 지금 5년이 훌쩍지나고 있으니 초기 활동했던 수준으로 계속 모일 수가 없더라고요. 미얀마 친구들도 그렇고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나 노동단체들도 마찬가지고요. 다들 일상이 있고 활동이 너무 바쁘니까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는 어렵죠.
중간에는 이런 식의 집회나 피켓팅을 그만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하다 보면 굉장히 관성적이 되기도 하거든요. 그냥 와서 피켓을 한 시간 들고 있다가 가는 거죠. 물론 더 마음을 쓰고 뭔가를 보태면 좋겠지만, 계속하다 보면 그냥 하게 될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꼭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하던 걸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는데, 그 끈마저 놓아버리면 미얀마의 쿠데타와 군부독재는 영영 우리에게서 잊혀지고 나중에 다시 사람들을 모아서 뭘 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한 달에 한 번 피켓을 드는 건 그렇게 큰 부담이 되는 행동은 아니니까, 몇 명이 오든 그냥 이어가 보자는 거였어요. 게다가 미얀마 민중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고, 한국에 있는 미얀마인들도 여전히 애쓰고 있으니 우리도 곁에서 같이 뭐라도 해야죠.
노동조합에서 장기투쟁 하는 곳들을 보면 ‘저래서 될까’ 싶은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계속 꿈틀거리고, 계속 외치면서 ‘우리가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걸 알리다 보면 어느 순간 국면이 바뀌는 때가 있죠. 물론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이 걸려도 계속 해나가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가늘게라도 이어가고 있어야 미얀마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네트워크 내부도 그렇고 계속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미얀마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은 해외에서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기억하고, 미얀마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된다고요.”
정은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계속 부산역에 모이는 일이 미얀마 분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김그루: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미얀마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 산악지대에 올라 군부와 맞서고 있는 청년들은 한국이든 다른 나라든 해외에서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기억하고, 미얀마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된다고요. 집회 사진을 찍어서 개인 SNS에 올리기도 해요. 우리가 직접 미얀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사람들이 결집해서 뭔가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때도 올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미얀마 동지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잖아요. 한국에서 힘겹게 번 돈을 모아 군부에 의한 피해지역을 후원하거나 군부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지원하는 등 사람들과 모여 무언가를 하든 계속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한 우리도 같이 뭐라도 해나가려고 해요.
파랑의 인권현장지원사업 <오늘의인권>의 지원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탐방을 다녀온 모습
정은주: <파랑>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분들과 광주에도 다녀오셨죠. 어떤 계기로 가게 됐나요?
김그루: 쿠데타 이후 2년 정도가 지나면서 우리도 조금 느슨해졌고, 미얀마 친구들도 마음은 계속 안타깝지만 패배감과 무력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이 생각해 볼거리, 같이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으니까 그 역사를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어떤 역사였는지, 그 역사를 지금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사람들과 함께 가려면 버스도 빌려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니 비용이 필요하잖아요. 파랑의 <오늘의 인권> 사업을 통해 지원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개 받아서 신청했고, 그 지원을 보태서 광주에 가게 됐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광주를 다 알아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몰라도요. 한국에는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있고,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은주: 미얀마에서 온 분들에게 광주는 어떻게 다가왔나요?
김그루: 미얀마 사람들은 광주를 다 알아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몰라도요. 한국에는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있고,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롤모델이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민주화를 이뤄낸 나라,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의 사례처럼 보는 것 같았어요.
광주에서 역사적인 장소들을 돌아보며 설명을 듣고 통역도 진행했어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소감을 나눴는데 그 시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몇몇 분은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이런 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함께 활동하는 우리도 다시 힘을 얻었죠. 과거의 광주와 현재의 미얀마가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만나서 서로 힘을 주고, 계속 싸우고,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정기적으로 매년 가면 좋겠지만 저도 일을 하고 있고, 사전에 계획해서 비용도 마련해야 하니까 쉽지는 않더라고요. 두 해 정도 진행했고, 올해 하반기에는 사람들의 요구가 있다면 광주까지 가지 않더라도 부마민주항쟁처럼 가까운 지역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공개된 장소에서 집회와 시위들을 하면서도 참여하는 미얀마 동지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노출되지 않게 조심했어요. 한국에서 이런 활동들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거든요.”
정은주: 한국에서 민주항쟁에 참여하는 미얀마 분들은 활동 사실이 알려지는 것뿐 아니라 여권과 체류 문제까지 연결돼 있다고요.
김그루: 공개된 장소에서 집회와 시위들을 하면서도 참여하는 미얀마 동지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노출되지 않게 조심했어요. 한국에서 이런 활동들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이주노동자도 미얀마에 돌아가서 구금될 수도 있어요. 실제로 한국의 미얀마 대사관에서는 미얀마인들이 한국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그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을 공개한 적도 있고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올리는 경우가 아니면 얼굴이 노출되지 않게 조심했어요. 언론에서도 관심이 많을 때라 촬영할 때마다 당부했고요. 한국에 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위험이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한국에 있는 미얀마인들은 외국인 신분이니까 체류비자가 굉장히 중요해요. 미등록 상태가 되면 활동할 수 있는 폭도 좁아지고, 강제추방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돌아가서 구금될 수도 있고요. 비자를 유지하려면 여권의 유효기간이 중요한데요. 서울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거나 의심되는 미얀마인들의 여권을 연장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미등록 체류자가 될수 있다고 협박하는 셈이죠.
그래서 한국 안에서는 미얀마 사람들이 겪고 있는 여권, 비자, 체류 문제를 좀 더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얀마 정부의 일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모든 걸 직접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우회적으로 압박하거나 다른 조치를 취할 방법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해야 할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미얀마 동지들이 계속해서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해나갈 수 있으니까요.
“아직도 누군가가 잊지 않고 있고, 계속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고, 잘되기를 바라고 함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미얀마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8888 항쟁을 기념해 진행한 집회 모습
정은주: 5년 넘게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사회의 반응도 달라졌나요?
김그루: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나 분쟁이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미얀마는 완전히 잊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부산역에서 피켓을 들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아직도 그래요?” 라고 묻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누군가가 잊지 않고 있고, 계속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고, 잘되기를 바라고 함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있는 미얀마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미얀마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오랫동안 싸웠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상황이 풀리지 않고 있잖아요. 그러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 수도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고 걱정하고 있고, 힘을 보태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그 정도라도 계속하는 거죠.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너무 많지 않으니까요.
“쿠데타 이전부터 부산경남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미얀마 공동체와 또뚜야라는 활동가의 존재가 굉장히 컸다고 생각해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산발적으로 나설 수 있어요. 그런데 그 활동을 지속하고 사람들을 계속 엮어가려면 중심이 되는 활동가가 필요하죠.”
정은주: 부산에서 미얀마 연대활동이 오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김그루: 부산·경남에는 쿠데타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황금빛살미얀마공동체>라는 미얀마 공동체가 있었어요. 그런 공동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미얀마 민주화투쟁을 이어가는데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또뚜야라는 활동가의 존재가 굉장히 컸다고 생각해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산발적으로 나설 수 있어요. 그런데 그 활동을 지속하고 사람들을 계속 엮어가려면 중심이 되는 활동가가 필요하죠.
또뚜야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곁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책도 있어요. 이주민 출신 활동가 여섯 명 정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들 그냥 일하러 한국에 왔던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고, 상근활동가가 되고,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담고 있어요.
“난 처음부터 이랬는 줄 아나.”
정은주: 선생님도 처음부터 활동가가 되려고 했던 건가요?
김그루: 학교 다닐 때 <이주민과 함께>를 알게 됐어요. 그때는 이런 단체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한국어교실에서 자원활동도 하고, 전화 받으라고 하면 상담 전화도 받고 그랬죠. 학교를 졸업할 때쯤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당시 상담을 하는 활동가나 사무국장 언니가 사업주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방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상황이 얼마나 험한지가 느껴졌어요. 거의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나 못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무국장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난 처음부터 이랬는 줄 아나.”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인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겠어요. 저도 계속 이런 활동에 관심이 있었고 꼭 이주민 분야가 아니더라도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정은주: 막상 이주노동자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는 어땠나요?
김그루: 너무 힘들었어요. 임금체불이든 산재든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 회사에 전화해야 하잖아요. 상담하러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회사에 연락하면 욕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특히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왜 다른 나라 사람 편을 드느냐는 거죠. ‘한국인이면 같은 한국 사람 월급 안 줘도 괜찮다는 건가?’ 싶었어요. 제가 20대였고 체구도 작으니까 무시하는 느낌도 많이 받았어요. 노동부에 진정 대리를 해서 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다 보니까 저도 악만 남아서 그때는 어떻게 하면 싸움을 잘하고 말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데 꽂혀 있었어요. 정말 많이 싸웠죠.
그 당시 이주노동자들은 권리 자체가 너무 취약했어요. 진정을 대신하고, 위임을 받아 노동부에 가고, 사업장에 같이 가도 계속 무시 당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도 악으로, 깡으로 하게 되는 거죠. 사건이 꿈에도 나왔어요.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내일 사장한테 연락하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은 지금 미등록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집에 가서도 계속 그 생각을 했어요. 상담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건의 결과가 어느 정도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 압박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운동을 하러 왔는데 여기는 왜 맨날 사람들을 도와주기만 하지?’ 어린 마음에는 여기가 무슨 지원기관처럼 느껴졌던 거예요. 그 마음이 정리된 건 한참 뒤였어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어요. 아무리 내가 시혜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일정한 권력관계가 생기잖아요. 내가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그러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너무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활동가들과 여러 가지 시도를 했어요.
“활동가의 역할은 단순히 해결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스스로 문제들을 인식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인 것 같아요.”
정은주: 어떤 시도를 하셨나요?
김그루: 우리가 무조건 모든 걸 대신해서 처리하면 당사자는 자신의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해줘도 그 사람이 다른 회사에 가면 똑같은 일이 다시 생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같이 노동부에 가기도 하고, 당사자가 직접 절차를 경험하도록 하려고 했어요.
한번은 노동부가 우리 같은 단체 없이도 이주노동자 임금체불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라는 의미로 임금과 퇴직금 체불된 이주노동자들을 모아서 매주 사전 교육과 진정서 작성 후 같이 노동부 가서 제출하고 조사 받게 했어요. 기존에는 활동가들이 동행하거나 대리해서 출석했지만 이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죠. 노동부 감독관한테 전화가 왔어요. “지금 엿 먹으라고 이러는 거냐”고요. 노동자가 임금체불로 노동부 갔는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건지. 그런데 사실 우리가 없어도 노동자가 임금체불을 당하면 노동부에 가서 민원을 신청하고 조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통역이 필요하면 노동부에서 통역을 섭외해서 진행해야 하는 거고요.
문제는 그렇게 하니 체불임금 해결률이 확실히 낮아진다는 거였어요. 적당히 합의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았고, 당시에는 현금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사업장도 많아서 증거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어요. 결국 체불임금을 전액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죠. 그치만 활동가들이 임금을 대신 받아주기만 하면 뭐가 바뀌겠어요. 그래서 이주노동자 교육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고,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지하는 일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러다 어떨 때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이게 본인 문제인데 왜 이렇게 하냐”고 화내며 말한 적도 있었죠. 결국 활동가의 역할은 단순히 해결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스스로 문제들을 인식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인 것 같아요. 당시는 그런게 서툴렀던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런 조건들을 좀 더 제대로 직면하고 바라보며 활동하고 싶어요.
“지금은 제가 이주단체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보니까 이주노동자 상담 관련해 잘 모르는게 있으면 이주민 활동가들에게 많이 물어보게 돼요. “이런 사건인데 어떻게 해야 돼요?” 이제는 그런 관계가 된 거죠.”
정은주: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주민 당사자 활동가들도 생겨났겠네요.
김그루: 활동과정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 중 한국어를 잘 하고 공동체 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은 노동상담 과정에서 통역을 비롯한 여러 역할을 도맡아 했고요. 주 6일을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일요일에 단체 활동에 함께하며 동지애와 신뢰를 쌓아갔어요. 그들과 같이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각종 문화행사와 교육, 캠프, 집회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습니다. 그 공동체 리더그룹과 여러 트레이딩 수련회를 하기도 했고요. 개별 노동자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만이 아니라, 부산시의 정책, 한국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도 함께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고 대외적으로 의견도 내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어요.
그 공동체 리더 이주노동자들이 십 년, 이십 년 후가 된 지금, 단체의 상담활동가로 자리잡고 많은 역할들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제가 이주단체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보니까 이주노동자 상담 관련해 잘 모르는게 있으면 또뚜야님 같은 이주민 활동가들에게 많이 물어보게 돼요. “이런 사건인데 어떻게 해야 돼요?” 이제는 그런 관계가 된 거죠.
최근에 부산다큐필름페스티발에서 <지금, 녜인>이라는 다큐를 봤어요. 미얀마 여성 녜인과 그의 한국인 배우자가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마치 군부의 만행이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에 있는 것처럼 마음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 주변의 미얀마 동지들 모습이 많이 겹쳐지더라고요.
투쟁이 장기화되면 심신이 지치기도 하지만 내부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의견충돌이 더 많아지면서 목표와 방향에 균열이 생기기도 합니다. 미얀마 민주화 투쟁 과정도 그런 고단한 상황들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게다가 독재자 민아웅흘라잉과 군부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걸쳐 강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서 마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처럼 행세를 하고 있어요. 부산에서 저희들도 군부의 가짜선거라고 외치며 집회와 캠페인을 했습니다만, 여전히 건재한 군부를 보면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게 사실이죠.
제가 본 그 다큐에서 녜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한국에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세요. 딸이 아버지와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자 아버지는 “그러면 이놈들이 이기잖아.”라며 군부에 저항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시더라고요.
한국사회가 온전한 자유,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미얀마의 현실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고 민주화된 것은 사실이죠. 그놈들이 이기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 녜인 아버지의 당부처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도 계속 해야지요.
김그루 활동가의 활동은 누군가를 대신하는 데서 함께 움직이는 쪽으로 이어져 왔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향한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이곳에서도 기억하고 목소리를 보태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이어온 시간은 누군가의 싸움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 곁을 잇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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