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활동가] 김경일 / 쉴 만한 그늘이

지금 파랑은

쉴 만한 그늘이

우리 갱일이 어데 가노

다섯 살 사내아이는 피부가 뽀얗고 유난히 눈망울이 컸다. 호기심이 많아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어찌나 이것저것 캐묻는지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귀여워했다. 아이가 골목에 나타나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갱일이 어데 가노?”, “밥 묵었나?”, “너그 형 뭐 하노?” 등등. 아이는 저 혼자 골목을 쏘다니며 간판의 글자를 읽기도 했다. 어른들이 말한 걸 잘 들어두면 되는 일이었다. 쌀집 앞을 지날 때면 쌀이란 글자를, 연탄집 앞을 지날 때면 연탄 글자를 읽었다. 눈을 깜빡이며 잘 기억해두면 저 글자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있어도 어떻게 소리내어 읽어야 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영특한 아이였다.

어느 날 길에서 교회 집사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픈 것도 낫고… 뭐 좋은 일이 막 생긴다는 거였다. 아이는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형을 낫게 해줄수 있어요?”

간절히 기도하고 진실로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은 고쳐질 수 있는 병을 앓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집안 어른은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다섯 살 아이는 그렇게 처음, 혼자서, 제 발로 동네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형은 중증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어머니는 전적으로 형을 돌보았다. 형은 특수학교를 다녔지만 도전적 행동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격적 이거나 과잉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안에서도 교사와 갈등을 일으킬 정도였다.

형에 대한 일로 부모님이 서로 언쟁을 벌일 때 아이는 외로웠다. 형이 특수학교마저 다니지 못하고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 걸 보며 아이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다. 둘째지만 형 몫까지 뭔가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친척들은 네가 장남 대신 더 잘하라며 격려인지 응원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책임한 인사말인지를 자주 했다.

어머니는 집에 계셨지만 형에게 모든 관심과 신경을 쏟아야 했다. 작은아들의 응석을 받아주고 살뜰한 애정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소년이 된 아이는 어느 날, 안경을 부러뜨렸다. 눈이 나빴기 때문에 학교 공부를 하려면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이다. 집안 형편에 비하면 꽤 고가의 물건이었다.

‘안경이 부러지면, 엄마가 나한테 오겠지.’

소년은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기껏 생각해낸 꾀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어머니는 형을 돌보기에도 힘에 부쳤다. 안 그래도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너까지 왜 이러냐는 말을 들을 것만 같았다. 그 뒤에 한 번 더 안경을 부러뜨려봤지만 마찬가지 였다. 철부지 노릇을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아버지는 화부터 내셨다. 너라도 잘해야지 하면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정할 때 주저 없이 사회복지학을 택했다. 형 같은 처지의 학생도 포용할 수 있는훌륭한 특수학교 교사가 될까도 생각해보긴 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쉽지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마음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것은 억울한 일을 겪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장애학 외에 청소년 상담 같은 것에 많은 관심이 갔다. 청년이 된 그는 어린 시절의 자기와 같은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고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애인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장애를 지닌 형 덕에 일찍부터 홀로 서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그런 시간이 어찌 보면측은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의 자기를 위로하고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을 돌보고픈 마음이었을까.

측은지심,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지니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상식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 밖의 사람들

2014년 4월 16일.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학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이었다. 전원 구조가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라고 하니까, 청소년 상담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관심이 갔던 걸까. 이상하게도 그날의 기억은 먹은 음식 메뉴며 공기의 냄새까지 선명하다.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가까운 데로 갈 것이지 굳이 제주도 가다가 사고 난 걸 왜 국가한테 따지냐는 사람들, 단식농성을 하는 유족 앞에서 폭식을 하는 만행, 유가족을 마구 비난하는 댓글… 그는 층격을 받았다. 왜 개인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는 걸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저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왜 진실 규명을 위한 투쟁이 유족의 몫이 되어야 하는 거지? 가장 울어야 하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에게 왜, 왜… 저들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게 없는 것인가.

이거 뭔가 사회가 잘못되었구나, 국가공동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가게 만드는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의 은사를 내려주십사, 물질의 축복을 내려주십사 개인의 영달만 욕망하는 종교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문제였다. 그는 종교의 의미를 법과 제도를 넘어서는 사랑의 실천에서 찾고 싶었다.

성경에 있는 혈루증을 앓는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 안에 살지 못하는, 배제당하고 차별받는 존재였다.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을 앓던 그녀는 성 안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가 몰래 성으로 들어갔다. 슈퍼스타를 따르는 인파들 틈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다. 누가 내 옷깃을 만졌냐고 예수님이 묻자 그녀는 자신이 그랬노라고 고백한다.

“옷깃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나을 줄 알았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노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경일은 성 밖의 병든 과부를 지금 우리 사회로 치자면 제도 밖의 사람, 예를 들어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거나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의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 스스로 활동가로서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이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을 찾아와 기대고,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에게 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성 밖의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기대어 쉴 수 있게 하는 사람 말이다.

항상 사회안전망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여 부산의료원이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었을 때, 노숙인이나 이주민 환자를 다 내보내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경일은 <사회복지연대>의 이름으로 모든 이들의 존엄을 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난지원금도 노숙인이라서 안되고, 이주민이라서 안 된다고 했던 것은 매우 차별적이다. 적정 주거지에 살면서 건강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공공보건정책을 세울 게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 될수 없는 사람들, 성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관심과 손길을 뻗어야 한다. 이른바 성 밖에 사는 사람, 제도라고 하는 다수의 보편적 틀에 포함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경일의 현재는 <사회복지연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2016년 이곳에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줄곧 있었으니, 햇수로는 8년 정도가 된다. 어떤 사람은 <사회복지연대>가 단체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과정이 곧 김경일의 활동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부산지역에서는 2005년에 복지예산 20%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그 운동을 주도했던 구성원이 사회복지사들이었다. 사회복지 현장의 목소리와 사회복지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야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사회복지연대>가 출발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들의 노조 같은 거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복지사가 노동자로서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건이 생길 때는 그들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활동의 범위와 다루는 문제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

모든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연대>의 활동과 방향성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를 일자리 측면으로 접근했거나 보수적인 정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히 후원회비를 내고 활동을 지지하는 회원들의 힘으로 <사회복지연대>는 운영되고 있다.

경일은 <사회복지연대>의 상근자로서 자신의 급여가 후원회비를 재원으로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 무게가 때로는 부담으로, 때로는 지나친 책임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진심을 다해 전력으로 대응해야 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데 일일이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었다.

경일은 <사회복지연대>의 일은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 일을 잘할 수 있는 사회가 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복지사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지역사회에서 최소한의 안전망, 성 밖으로 내몰린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는 사회라는 의미이므로.

지금 여기 또 다른 형제복지원

어느 날이었다. 한밤중, 지쳐 쓰러져 정신없이 잠들었는데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렸다. 급한 일인가 싶어 잠결에 받아들었더니 누구라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쌍욕이 날아왔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분이었다.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건만 수화기 너머 그분은 경일에게 온갖 분노를 내뱉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야. 네가 형제복지원 팔아서 유명해지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이용해 먹는 거 내가 다 알아.”

술 취한 목소리는 억울한 세월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면서 경일을 붙들고 늘어졌다. 경일은 전쟁 영화 속 트라우마를 겪는 노병을 생각했다. 그럴 만도 해, 그럴 수 있어. 오죽하면 이러시겠어. 들어주자, 들어줘야 해. 이런 상황이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는 애써 되뇌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를 위한 투쟁은〈사회복지연대〉일을 시작하면서부터, 2022년 8월 국가폭력이라는 판결이 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일이었다. 그동안 피해자 인터뷰며 증거자료를 무수히 읽고 듣고 보았다. 그 잔상이 경일에게 분노와 의지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지만, 트라우마가 전이되는 계기가 되었다.

악몽도 자주 찾아왔다. 형제복지원에서 울고 있는 어린 자신을 보는 것은 아왔다. 처음엔 영화 속 장면인 줄 알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여기 형제복지원에 있는 거지? 가 본 적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곳인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심지어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그 안에 있었다. 그가 도와야 할 사람들, 그들이 지닌 고통이 그대로 그의 몸을 관통했다. 꿈이지만 끔찍스러웠다.

직접적인 피해당사자를 대면하고 위로하고 증거자료를 모으거나 조직을 연결하는 일에 경일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피해당사자들이 경일을 향해 어떤 방식의 분노와 억울함을 표현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막상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그의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건조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기 기분을 표현할 만한 적당한 낱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 하는 게 다였다. 멍하면서 좋았다고 할까. 해방감이 느껴진 건가. 벅찬 기쁨과 보람이 느껴져서 눈물이 쏟아졌다. 기뻐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딱 드는 것이었다. 이제 저한테 따지지 마시고 국가한테 따지세요, 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배상이나 사과가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인간의 존엄을, 미래에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기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상규명 이 필요하다.

경일은 지금 여기에 또다른 형제복지원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봄과 자활이 필요한 노숙인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수익성이라는 잣대로 사람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제복지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른바 유인 입원이라고 불리는 관행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노숙인을 의료기관에 입원시켜 건강보험기금과 의료급여예산을 받아 수익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의료법 위반이나 개인 인권 침해를 차치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수익창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그 구조 자체가 문제다.

경일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함께해 온 활동가로서 역사 앞에, 피해자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싶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더이상 유사한 국가폭력이나 인권 침해가 생기지 않도록 앞장설 것이다. 그것만이 성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내어주고 곁에 함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나, 활동가로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일까요?

사람들은 활동 성과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 보람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보다는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의 분들과 함께 있을 때 큰 위로를 받아요. 예전에 사회복지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인권 침해를 당한 장애인이 계셨어요. 저에게는 거의 어머니뻘 되는 분이셨는데, 그분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었어요. 그분이 저에게 90도로 인사하시던 모습이 참 오래 남아있어요. “우리 같이 못 배우고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진짜 많은 도움이 필요하니까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의지할 데 없이 어려운 일을 겪는 분들 곁에서 뭐라도 힘이 될 방법을 찾고 그분들 편에 설 수 있다는 게 제게는 가장 큰 보람인 것같아요.

우리 사회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국민의 삶이 어려울 때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죠. 하지만 대상자 선정기준이나 지원사업의 분야가 정해져 있어서 실제 어려움을 겪는 분들 가운데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분도 계시잖아요.

그럴 때 저는 공공부문이 하지 못하는 일을 민간에서 해결하기 위한 시도들을 해요. 기업의 사회공헌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원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거죠. 이를테면 관절염을 알던 시각장애인 할머니는 화장실 가는 게 하늘나라 가는 것보다 무섭다고 하셨어요. 그댁에 타일시공자협회의 지원으로 화장실과 집수리를 진행했어요. 노숙 위기에 놓인 남매를 만났을 떄는 안과병원으로부터 수술을 지원받았고요. 라섹 수술이 미용 목적이 아니라 생계 목적이라는 것을 알리고, 또 다른 단체의 지원으로 대학병원 수술비를 지원받은 적도 있어요.

이렇게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나 복지제도가 촘촘하지 못해서 삶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만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있을 때 큰 보람을 느껴요. ‘운동’이나 ‘활동’이라고 하면 다소 투박하고 과격한 이미지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권리를 함께 지키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복지연대>에서 해온 활동 중 형제복지원 사건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형제복지원 문제가 어떻게 귀결되기를 바라세요?

먼저는 사회복지사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의미가 있어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랬었다.’는 말로 부산의 사회복지계는 이 부끄럽고 참혹한 진실에 대해 그동안 침묵해왔다고 봐요. 당시 운영되던 사회복지법인을 지금은 자녀들이 물려받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친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기방어를 일삼는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당연히 역사 앞에 참회하고 하루빨리 진실을 밝히는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이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요. 한국전쟁 이후 도시가 형성되고 국가가 발전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건데요, 다시 말해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큰 의제들 속에서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 할 이들의 존엄이 후순위로 밀려난, 그 흐름의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봐요. 한 기관, 법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묵인해 왔던 후진적인 사회복지, 반인권적 정책들을 짚어보는 일인 거죠.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런 맥락에서 가장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건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사회복지연대>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기록들을 발굴하고 증언을 모으고,기획 보도를 통해 관심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과거사법이 개정되고 1) 부산시의 조례와 센터 설치2) 등의 성과를 이끌어냈어요. 하지만 배상액이 얼마냐,지원사업의 규모가 얼마냐 하는 것으로 사건이 정리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는 국가 정책의 실패와 그 피해를 소상히 기록하고 후세대에 남기는 것, 잊히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한 지 927일이 되던 2020년 5월 2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을 포함한 과거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꾸릴 수 있게 되었고,2023년 2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2) 2018년 9월 16일,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에서 부산시에 흩어져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 자료들을 모두 찾아달라는 것을 포함한 11가지 요구사항을 부산시에 전달하였고, 같은 날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소홀히 하여 시민인권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공식사과한 바 있다. 이어 2019년 4월 10일, <부산광역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고, 조례 제5조(피해자 종합지원센터의 설치⋅운영)에 근거하여 2020년 1 월 30일 동구 초량동에 62평 규모의 <부산광역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종합지원센터>가 개소되어 운영 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상금과 정부의 지원사업만으로 형제복지원 안에서 일어난 잔혹했던 시간을 지워낼 수 없어요.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까지 삶에 영향을 받는 피해자, 유가족, 실종자 분들이 잃어버린 세월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잖아요. 국가가 잘못했다는 명확한 인식과 인정이 우선되어야 하고 경찰, 검찰, 지자체 및 사회복지법인, 시설 등이 저지른 참혹한 역사를 정확하게 발굴하고 정리해서 알리는 것이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미래의 어떤 시대가 와도 제대로 기억하고 또 인식하기 위해서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해올 수 있었던 힘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는 분노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대한 분노,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분노, 공감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분노를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힘으로 썼는데요. 분노는 사람을 발리 끓어오르게 하는 좋은 기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요즘에는 분노를 동력으로 삼지 않으려는 노력을 좀 해요. 분노를 동력으로 활동하다 보면 좀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경향이 생기고, 이기고 지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분노는 적대적인 감정이니까요. ‘이 나쁜 사람을 법적으로 처벌받게 할 거야! 행정처분을 받게 할 거야!’ 이런 목표로 활동을 하다 보면 결국 승패로 나뉠 뿐이지요. 사실 활동은 이기고 지는 문제로 정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잖아요.

이제는 의무감인 거 같아요. 제가 그동안 회원들의 회비를 통해서 활동하면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도 했지만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과 자산이 많아요.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역사회의 인적 자산이기도 하잖아요. 지난 활동을 통해 경험했던 것들, 봐왔던 것들, 느꼈던 것들이 참 소중하거든요. 그런 경험을 통해 성장한 역량으로 더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 성과를 넘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쓰일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활동하는 단체인 <사회복지연대>의 가치를 인권운동의 방향으로 옮기려는 노력도 했고요. 미등록 이주민이나 노숙인, 무연고 장애인처럼 제도권 밖에 있는 분들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그분들에 대한 사회정책을 만들어나가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점점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무감이 생겨요. 부산에서 적어도 사회안전망, 사회복지 관련 인권운동에서 내가 해온 활동이 있고 채워갈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맥락에서 책임감, 의무감이요.

올해는 어떤 활동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마음을 쓰고 계세요?

올해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지금 시대의 상황에 적용해보는 일에 가장 마음을 쓰고 있어요. 당시 부랑인이라고 명명되어 억울하게 잡혀갔던 이들, 혹은 정말 돌봄과 자활이 필요했던 이들이 지금 시 대에는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데요, 현재 저의 답은 노숙인에게서 찾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잔혹한 국가폭력시설은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수익성의 잣대로 사람을 이용하는 곳들은 여전히 남아있거든요. 사회에서 배제된 가난한 이들의 종착역이 그들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복지 현장과 정신의료기관, 요양의료기관 그 어떤 곳이라도 말입니다.

이권을 위해서 사회복지 현장의 취약한 부분들을 이용하는 나쁜 법인들을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지 고민이 있고요. 저는 사회복지 현장의 그런 악습의 잔재를 없애고 싶어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함께해 온 활동가로서 역사 앞에, 피해자 분들 앞에 당당할 수 있으려면 현재 그리고 미래에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국가폭력, 인권침해 사건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어요. 제 마음이 닿는 곳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마음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고요.

마지막으로 활동가로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헌신하는 활동가가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 하면 거창할까요. 함께 일하던 후배가 활동을 그만두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나의 미래가 김경일이면 나는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거 같다고요. 생각해보면 되게 가슴 아픈 말이에요. 나와 가족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때로는 너무 지치고 무겁다는 것을 아니까요. 인권 활동가들이 조금은 덜 치열하게, 덜 힘들게 활동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어떻게 그런 활동의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되지요. 그런 차원에서 제가 파랑을 많이 응원하는데, 파랑이라는 플랫폼이 부산지역 활동가들이 오래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함께 고민하고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몸도 마음도 지쳤던 때가 있었어요. 저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활동을 건강하게 해나가려면, 일단 잘 쉬는 법을 익히고 같은 호흡으로 오래 함께 갈 수 있는 동료들을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계속 공부하는 활동가가 되려고 해요. 갈수록 인권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 굉장히 다양해져요. 용어 사용에도 민감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해지는 사안에 어떤 입장을 갖고 대응해야 할지 정말 고민하고 배워야 할 게 많거든요. 인권 현안과현장의 요구들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데 맨날 하던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정체되거나 도태되지 않도록 배움의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활동가로서의 꿈을 물으셨지만, 활동가라고 유별나지 않게 그저 보통의 삶을 다른 존재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사회복지연대

사회복지연대는 사회복지를 매개로 운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고민하며, 시민의 사회권 보장을 위해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운동, 공공병원설립 운동, 사회안전망 강화 운동을 부단히 펼쳐내고 있습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대로 242, 405호
전화번호: 051-753-1207
SNS: https://www.facebook.com/busanbokji

9지금 파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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